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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7 원데이 인 홍대
  2. 2009/02/27 아포리즘
  3. 2009/02/02 헤드폰 스페이스 2회 - 오지은, 그 음악을 구성하는 퍼즐
  4. 2009/01/27 V for Vendetta
  5. 2008/10/09 <도서관 전쟁> 시리즈, 하리카와 히로
  6. 2008/09/30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7. 2008/09/29 <다크 나이트> 영화와 함께 출간된 배트맨 만화들
  8. 2008/09/17 <로드> 코맥 매카시
  9. 2008/09/16 최근에 읽은 책 몇 권 <저스티스> 외
  10. 2008/09/08 뱀파이어와의 로맨스 : '트와일라잇' 시리즈
  11. 2008/08/19 만화는 움직이는 거야. 8권쯤에서 - 《클레이모어》
  12. 2008/07/17 미워도 다시 한번 힘, 《헌터x헌터》
  13. 2008/06/11 아임 낫 데어 : 밥 딜런이 거기 없더라
  14. 2008/06/05 이토록 멋진 대체 역사물 - 《오오쿠》
  15. 2008/04/28 오래 지속하는 컬트, '팜(Palm)' 시리즈
  16. 2008/04/14 아무 것도 아닌 청춘의 연가 《바이 바이 베스파》
  17. 2008/02/15 죽음을 이겨내는 힘, 《이 멋진 세상》
  18. 2008/02/03 《베리타스》 “사부의 복수!”
  19. 2008/01/10 <라이프 온 마스> 타임슬립으로 떨어진 영국의 70년대
  20. 2007/12/29 환상의 세계를 물레로 자아내다,《마녀》
  21. 2007/12/01 <바람의 나라>가 <태왕사신기>와 다른 이유
  22. 2007/11/29 안경 메이드와 13세 메이드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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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2007/10/29 미드 속 치어리더, 학교 대표 킹카인가 생각 없는 애들인가
  25. 2007/10/09 어둠용 노이긴이 지배할 때
  26. 2007/10/08 한국 대중음악이 탐미에 빠졌던 순간
  27. 2007/09/25 하우스 박사님, TIVO가 대체 무엇이기에
  28. 2007/09/08 메러디스의 음악 취향은 80년대?
  29. 2007/07/15 《닥터 후》와 BBC의 정치적 공정성을 향한 노력
  30. 2006/11/02 Nell - Healing Process(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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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데이 인 홍대
- 깜악귀

1. P.M 02:00~

오후 2시, 늦게 일어났다. 붕가붕가 레코드의 곰사장이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그보다 늦게 일어났을 터다. “책 나왔어요, 볼래요?” “그래” 최근에 발매된 붕가붕가 레코드의 책 -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에는 그들과 대학시절부터 같이 다닌 내가 앞부분을 썼다. 그 책이 막 형태가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일부분을 쓴 사람으로서 가서 펼쳐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곰사장은 상수역 근방의 카페 ‘Mother Moon’에 있다고 했다. 어딘지 몰라 물어서 찾아간다. 찾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2년 전만 해도 그런 곳까지 카페가 생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본래 홍대라는 구역은 인디 밴드가 공연하는 라이브 클럽이 있는 곳이고, 그 후에는 ‘춤추는’ 클럽이 있는 곳이었다. 옷가게, 미대 입시 학원, 출판사나 디자인 사무실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홍대만의 특징이 되기엔 어려웠고 결국 이 두 ‘클럽’의 분포가 ‘홍대 문화’의 면적을 규정했다. 홍대는 곧 ‘클럽’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카페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가가 홍대라는 영역을 규정하고 있다.

홍대라는 영토는 보통 홍대의 정문으로부터 연남동의 청기와 주유소로 내려가는 메인 도로를 기점으로 좌우로 나누어 구분한다. 이 좌우를 농담 삼아 ‘이스트사이드’ ‘웨스트사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동서가 아니라 북동, 남서지만) 이스트사이드에는 라이브 클럽 및 삽겹살 집, 웨스트사이드에는 하우스 or 힙합 클럽이 들어섰다. 카페는 이스트와 웨스트의 양쪽에 고루 분포되어 있지만 그 문화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스트사이드에는 1인 경영의, 인테리어 등도 주인이 직접 한 작은 카페나 바가 많고 웨스트사이드에는 그에 비해 자본이 개입된 카페와 바가 있는 편이다. 이런 구분이 점점 의미가 없어지고 있긴 하지만.

‘Mother Moon'은 웨스트사이드의 끝에 있다. 그곳에는 라이브 클럽도, 댄스 클럽도 없으며 카페와 와인바와 간단한 먹거리 장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도 이제 홍대의 일부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 1년 동안 홍대는 서부를 개척한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카페의 번성은 곧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홍대의 인구가 이렇게 많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리 없잖아” 틀린 생각이었다. 카페가 많아지자 전에는 홍대에 올 이유가 없었던 이들까지 홍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도로 면적이 부족하면 고가도로와 지하도로가 생긴다는 식으로, 다른 곳이라면 상가가 성립될 수 없는 공간에 카페가 임대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던 주택이 개조되고 조금 클 뿐인 차고가 간단한 공사를 통해 점포가 되었다. 그래서 홍대의 상가는 이제 입체적인 구조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오후와 저녁까지 영업하는 카페가 많아지자 와인바, 일식 주점 등 밤을 담당하는 소규모의 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공간도 생겨났다. 현재 홍대는 몇 가지의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레이어는 무늬가 있는 반투명한 종이와 같아서 모두를 겹쳐보아야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보인다. 그 레이어는 대체로 이렇다.

① 옷가게 (비싸진 않지만 개성적인 옷들) ② 라이브 클럽 (밴드 문화의 요람) ③ 댄스 클럽 (금요일과 토요일의 지배자) ④ 카페 (지금 홍대의 패왕) ⑤ 와인바 일식집 등 개성적인 주점 (신흥세력)

어떤 사람은 댄스 클럽과 맞물린 카페와 주점의 번성을 일종의 상업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홍대는 이제 많이 상업화되었어. 예전의 홍대가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홍대에서 카페나 바를 내는,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물론 카페나 바는 일종의 비즈니스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비즈니스는 존재의 표현이며 증명에 다름 아니다. 내가 아는 종류의 ‘문화계’ 인간들은 대체로 홍대에 카페 하나 내고 싶어하는데, 하나같이 ‘수익에 신경쓰지 않고’ 그냥 나만의 공간으로서 운영하고 싶어한다. 사실 돈을 벌려면 펀드에 열중하거나 큰 자본을 끌어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이 홍대에서 ‘카페’를 내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상업이 어쩌구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욕망의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는 밴드를 하고 싶다는 것이나 카페를 하고 싶다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먹고 살 수 있건 없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살고 싶어. 밴드를 하고 싶어.
- 수익에는 큰 신경쓰지 않고 카페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네.

그래서 ‘서부’의 신개척지에 생겨난 새 카페에 붕가붕가 레코드의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어찌 보면 자연스운 모습인지도. 새로 나온 책이 한 켠에 쌓여져 있다. 새우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오후의 아침으로 하고 책을 펼쳐보았다.


2. P.M 03:30~

책에서 나는 나를 비롯한 일련의 동네 아이들이 어떻게 대학에서 만나 악기를 들고 공연을 시작, 종국에는 홍대로 진출했는지를 썼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진출자’ 중 ‘브로콜리 너마저’와 ‘장기하와 얼굴들’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에서 비롯된 책의 출판이지만 책에는 다른 이야기가 좀 더 많이 쓰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시절, 나는 통기타로 노래를 만들며 홍대를 갈망했다. “언젠가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말겠어.” 무리를 모아 밴드를 만들고 결국은 클럽 ‘재머스’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3년 전에는 자취방을 홍대로 옮겼다. 한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 내 방은 와우공원 근처, 라이브 공간인 쌈지스페이스 위쪽이다. 복덕방 주인이 이 방을 소개시켜줬을 때 나는 홍대를 내려다보는 그 입지에 열광했다. 반지하여서 멋진 야경 따위는 보이지 않지만 풍수로는 홍대를 베게삼아 잠드는 위치다. 아파트 건물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눈 아래 홍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메인스트리트가 나온다. “이 공간은 내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자신이 홍대의 원주민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몸은 본래 홍대에 살던 사람이라는 식이다. 누가 홍대 인디 문화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며 - “홍대는 홍대일 뿐” - 홍대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거주민으로서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크리스피 도넛’이 들어왔을 때도, ‘스타벅스’가 두 개나 들어왔을 때도 환영하진 않았고 카페가 너무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도 “콩 짜낸 물 파는 가게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서는 거야!”하고 짜증을 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딱히 인디언은 아니며 그들이 홍대를 어지럽히는 백인인 것도 아니다. 나도, 수많은 카페의 주인들도, 붕가붕가 레코드의 아이들도 결국에는 이민자에 불과하며 홍대 바깥에서는 그저 이상하게만 보일 외래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안고 이리로 왔다. 올 데가 여기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홍대는 일종의 문화적 아메리카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피부색이 아니라 자신이 획득한 문화적 정체성에 따라 이런저런 일을 벌인다. 문화적 이탈리안은 카페를, 프렌치는 와인바를, 라티노들은 댄스 클럽을, 브리티쉬는 밴드를, 중국계는 먹거리 장사를 한다. 서로 차별할 것은 없다.  

기하가 홍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라는 식으로 TV와 신문을 장식할 때 (기하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래 홍대를 종횡해 왔던 밴드들은 조금 어이없어 했을지 모른다. 그야 기하는 정통적인 홍대 뮤지션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드럭(drug)’ 출신이면 정통이란 말인가? 크라잉넛 형들은 본적이 홍대로 되어 있기라도 한가? 일찍 오고 늦게 온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모두가 굴러온 돌에 불과하지 않은가. 예전에 본 어떤 미드의 대사가 떠오른다. 양식장이 천연어종을 말살시키고 있다고 환경운동 단체의 변호사가 고발하자 반대편의 변호사가 외친다. “양식장이 뭐 어쨌다고요. 솔직히 말해 우리 아메리카 자체가 거대한 양식 어장 아닙니까!” 홍대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이곳 전부가 한국에서는 키우기 힘든 종들을 재배하기 위한 양식장인 것이다.

생각에 빠져 있는데, 곰사장이 뻐끔거리며 말을 건다.

“책은 다 읽었나? 어때?”
“내가 쓴 대목이 이상한 것 같아. 너가 쓴 대목은 괜찮은 것 같군.”
“… 형이 쓴 대목은 괜찮은데. 내가 쓴 대목은 도저히 못 읽겠다.”

우리는 애써 아쉬움을 접고 레이블 공연의 세부사항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각 밴드 공연의 중간에 영상을 넣으면 어떻겠느냐니, 영상은 케이블 방송의 모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시나리오면 좋겠다느니, 앨범 녹음 전에 팬들에게 선투자를 받으면 어떻겠냐느니 하는 이야기. 한편 곰사장은 출판사에서 출판 마케팅의 일환으로 서점을 돌며 싸인회 및 대담을 기획 중이라고 말한다. 나도 거기 나가야 한단다. 맙소사, 내가 왜 그런 자리에 나가야 한단 말인가.  

“기하나 덕원(브로콜리 너마저)이가 나가는 걸로 충분하잖아. 내가 거기 나가는 건 위치가 묘한 것 같다.”
“그래도 저자잖아.”
“책의 일부만 썼을 뿐이고 사실 내가 딱히 붕가붕가 레코드 관계자도 아니잖아.”
“이봐요, 출판 인세의 일부를 받잖아?”

할 말이 없다. 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가면 되잖아… 젠장.” 곰사장이 달래듯 커피와 샌드위치 값을 치른다. 우리는 헤어지고 나는 마감에 임박한 이 글을 쓰기 위해 또 다른 카페를 찾는다. 나는 집에서는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는 체질이다. 어딘가의 카페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돈이 아까워죽겠지만 일이 닥쳐오면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홍대 카페의 특징 중 하나는 대체로 무선 인터넷이 보장된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지역, 이를테면 신사동 가로수길 카페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노트북을 들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저기는 파워맥 최산형이고 저쪽은 도시바 넷북, 저쪽은 소니 바이오. 노트북이 많다는 것은 직장인 보다 대학생이나 프리랜서가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기 있는 사람은 방송 작가, 저기 있는 사람은 디자이너. 나도 따지고 보면 프리랜서다. 좋아서 그런 건 아니지만.

겨우 2페이지인가 썼는데 문자가 온다.

[OOO랑 홍대 클럽에 가려고 하는데… 갈래?]
[난 오늘 마감이라… 잘 놀아라]


3 P.M 09:23~

집중력의 한계에 달할 때까지 글을 쓰다가 밖에 나오니 어둑어둑하다. 10, 11시쯤 되면 클럽을 목적으로 홍대로 오는 사람들이 거리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날이 추워져서 여성들의 노출도는 크게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볼 만한 차림들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클럽에 잘 가지 않는다. 나는 힙합 음악 취향이 아닌데 홍대의 클럽은 어느새 힙합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홍대는 이런 클럽들을 거점으로 다종의 외국인이 국내인과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친구를 따라 클럽에 갔을 때는 좋은 구경을 했다. 외국인 남성과 한국 여성의 끈적끈적한 탠덤이 그것이었다. 큰 댄스 클럽 말고 작은 술집 겸 클럽에서 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마침 구석 자리의 소파에는 외국인과 키스에 열중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 물론 전혀 나쁜 일이 아니고 눈에 좋은 구경거리지만 이런 의문이 들긴 한다. 만일 내국인 커플이라면,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놀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난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커플이 그렇게 놀고 있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반드시 외국 남성과 한국 여성인 커플만 이런 모습을 타인에게 내보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서로에게 이국성을 느끼는 커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성은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해방시키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은 강남권 일부를 제외하면 홍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 종로나 안국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홍대는 일종의 ‘이국’이고 우리는 여기의 이민자로서 ‘이국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허용받는다. 혹은 외부의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를 열심히 이쪽의 사람들에게 덧씌우려 하거나.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친구들이 보낸 문자가 있다. 클럽 ‘Ska2’로 간다고 한다. 나는 문자를 무시하고 다른 카페를 찾아 노트북 가방을 메고 헤멘다. 목적한 카페로 가는 길에 <마콘도>라는 바의 간판이 보인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는 간판이겠지만 나는 안다. 이곳은 1997년에 오픈한, 한국 최초의 살사바라는 것을.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홍대는 ‘살사(salsa)’ 댄스의 중요 지역이다. 살사 댄스는 쿠바에서 기원해서 미국화된 커플 댄스로 홍대 인근에는 다수의 살사바가 운집해 있고 직장인들은 퇴근과 함께 셔츠를 풀어헤치고 이 자유분방한 라틴 댄스를 즐긴다. 이것은 홍대의 또 다른 얼굴이고 위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은 은밀한 레이어 중 하나다. 살사 역시 홍대로 이주해온 이국의 문화로, 그런 점에서 홍대는 결국 이주와 혼합의 공간이 아닐지.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언제 이 공간에 흘러들어온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

목적지, ‘한 잔의 룰루랄라’는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다. 사실 이 카페 주인 중 한 명은 서울 외곽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좋은 술집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홍대로 이주해오라고 열심히 유혹했다. “중앙으로 진출하고 싶지 않아요? 홍대에서 승부를 봐요!” 그는 동업자를 찾아 공동 사장의 형태로 홍대에 카페를 열었다. 음식점을 하지 않은 이유는 “홍대=카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공동 사장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남은 사장 혼자서 꾸려가고 있다. 이 사람은 1년 후에 해외로 이주할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 때는 아마 권리금을 받고 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터다. 하지만 이곳에 자신만의 작은 카페를 열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누군가가 또 특이한 카페를 오픈할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2층의 입구 근처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돌린다. 단체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주인장과 적당히 잡담도 하고 글도 쓸 요량이었지만 입구에서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된 김에 다른 밤샘 카페를 찾아야 한다. 카페에서 카페로, 한 마리 양식어처럼 유영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짓은 그만 두도록 하자. 조금만 더 쓰다가 나의 요람이 있는 와우산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홍대를 베게 삼아 잠이 든다.

20091020 in 홍대

<상상마당 단행본 '홍대의 하루' 용 원고>

2010/01/07 09:37 2010/01/07 09:37
article 2010/01/07 09:37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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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삶이든 행복한 삶이든, 어떤 사람의 삶이든

삶이라는 것의 과정이나 결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필연적인 보상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얻은 열매는 삶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고통받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그 고통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당신이 행복한 것에도 의미는 없습니다.

당신이 다른 이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은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꿈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 뿐입니다.

당신이 당신 이상이도록 만들어주는 그 무엇인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찾아 헤메어 손에 잡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신 머리 속에 있는 어떤 형상과 닮아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잡고 탐닉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질서는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그걸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당신 자신보다 못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면 다시 당신은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헤메겠지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삶이란 그저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흘러가는 과정이며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 뿐이라고요.

하지만 이것은 굳이 알아야 하거나 믿어야 할 지식이 아니므로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2009/02/27 00:00 2009/02/27 00:00
article 2009/02/27 00:00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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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그 음악을 구성하는 퍼즐

음악 씬 사람들을 만나 영향받은 뮤지션과 앨범, 노래들을 묻는 헤드폰 스페이스 제 2탄! 이번에는 ‘지은 1집’을 발매하며 인디씬의 대표 여가수로 성장한 오지은을 만났다. 어릴 때부터 항상 노래하는 아이였으니 ‘영향받은 노래는 결국 따라부른 노래’라는 오지은의 주크박스 역정을 살펴본다.



깜악귀 : 안녕하세요. 헤드폰 스페이스 제 2탄은 인디씬의 마녀, 여왕, 혹은 ‘인디 씬의 오지은’씨를 모셨습니다. 이번 코너의 컨셉은 ‘가수 오지은이 따라부른 노래들’입니다.

오지은 : 맞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죽 따라부른 노래들을 한 소절이라도 불러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깜악귀 : 언제부터 노래한 기억이 나요?

오지은 : 노래부르면서 처음으로 돈을 받은 기억은 유치원 때였어요. 그 때 우리 유치원은 김완선이 최고였거든요.

깜악귀 : 갑자기 춤추는 대목이 떠오르네요.

오지은 : 완전 췄죠. 나도 나의 춤과 노래에 이만큼의 공을 기울이니까 너희도 돈을 내라 - 라는 식의. 프로 뮤지션의 자세였죠. (웃음)

계속 보기..


p.s 아쉽게도 마이스페이스의 '헤드폰 스페이스' 인터뷰는 2회로 조기 종료되었다. 다른 컬럼들도 전부 종료되었으니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좋은 기획을 맡았다 생각했는데 정말 아쉽지 뭐야. 동영상은 마이스페이스에도 업로드 되어 있지만 2회가 미처 정식 업데이트되기 전에 서비스가 종료되었기 때문에 글 버전은 내 블로그에 올린다.
2009/02/02 18:22 2009/02/02 18:22
article 2009/02/02 18:22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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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를 지금 보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이명박 정권 치하에서 이 만화를 보는 것은 꽤 멜랑꼴리한 경험이다.

요컨데, 우리는 꽤나 명백한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독재 정권 아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되었건 국민의 (불명확한)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p.s '브이 포 벤테타'는 몇몇 부분에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는 새로운 로빈이 될 소녀가 불량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서 배트맨에게 구해지는 장면이 있다. '브이 포 벤데타'의 이비는 국가 경찰 요원인 '핑거맨'들에게 성폭행 당하기 직전에 구해진다. 둘 다 영웅의 '후계자'가 되는 여성이다.

마초 파시즘에 맞서는 가면을 쓴 히어로'라거나, 그 뒤를 잇는 '소녀 계승자'. 국가주의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민중에 대한 리셋 버튼으로서의 무정부주의 찬양 등 골자가 되는 몇몇 요소에서 두 만화는 닮아 있다. 무어가 음울하다면 밀러는 마초적이긴 하다. 굳이 영향관계를 따지자면, 무어가 먼저가 아닌가 싶다.

2009/01/27 03:32 2009/01/27 03:32
article 2009/01/27 03:32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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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이야기부터 해보자. 여기 지금과 거의 비슷하지만 한 가지 요소만 다른, 가상의 일본이 있다. 그 한 가지 요소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속에 '미디어 양화법'이라는 이름의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것. 이 법안으로 인해 '미디어 양화 위원회'라는 국가 기관에서 서적에 대한 검열을 합법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양화 위원회의 판단에 의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되는 서적, 영상작품, 음악작품이 단속된다. 모든 판단 기준은 양화 위원회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되며 심지어 저항하는 자에게 무력의 행사까지 허용되었다. 저항하는 자에게 자체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검열을 강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적을 사는 사람에 대한 죄는 묻지 않으므로 일반 시민에게 무력이 행사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독자에게 판단될 기회조차 제공되지 못하고 단속된 책의 피해는 고스란히 서점과 출판사에 넘어가고, 덕분에 책 값은 현행의 두배로 뛰었다. 그러나 시민의 도서관 이용은 더욱 활발해졌다.

도서관은 양화 위원회의 활동에 반하여 지방자치제에 기대어 '도서관 자유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도서관을 검열에서 자유로운 영토로 놓고자 하는 자치법안으로, 서점에서 몰수당하더라도 도서관에서만은 원하는 책을 열람할 수 있게 하자는 선언이다. 이 의지를 지키기 위해 도서관은 자치적인 경비대를 지니게 된다. 그 이전에는 양화 특무 기관에서 도서관을 무력으로 습격하여 검열 대상 서책을 파괴하더라도 경찰의 출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동안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대규모의 도서가 불에 탄 사건이 발생하자 도서관은 자체적인 경비분과, '방위원'을 창설한다.

이제 검열 대상이 된 서적이 도서관에 운반되는 동안 양화 특무기관은 운송차량을 습격하고 도서대는 이를 지켜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단순한 실갱이가 아니라 실탄이 오가는 국지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도서를 열람하게 할 수 없다"는 쪽과 "도서관은 자료수집의 자유를 지니며 이용자의 열람권을 보장한다"는, 책을 사이에 둔 전쟁이다. 형식적인 전쟁이 아니어서, 당연히 사상자가 나온다. 민간인을 휘말려들지 않게 하고 있지만 사실상 일종의 내전상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확 끌리는 설정이 아닐까. 책에 대한 검열 따위 있을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고, 책에서 말하는 대로 "호러 소설을 읽는 녀석보다 책을 좋아하는 주제에 어른이 권하는 추천 도서만 읽는 녀석이 더 무서워"라는 말에 동감한다면 더 끌려들 터.

"도서관의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우리들은 단결해서 끝까지 자유를 지킨다" 뭐 그런 거다. 일본이 실제로 미풍양속을 근거로 만화 및 서적을 심하게 검열했던 역사가 있어서 상당히 근거를 지니는 설정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대체로의 대중은 별 신경쓰지 않고 살고 있다- 는 설정도 나름 현실적이다. 한국에 전례가 없었던 일이 아니어서 공감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는 일본 학생운동의 로망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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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할 수 있는 설정 이야기를 꽤 했는데, 이 소설에 대체역사물(SF) + 밀리터리물의 성격이 있고 '도서 검열과 열람권을 둘러싼' 일본의 현실 정치적인 이야기(물론 가상이지만)가 꽤나 설득력있게 전개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을 뿐, 소설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경쾌하고 빠른 템포로, 부담 없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니 안심할 것.  

여성치고는 키가 크고 체력이 좋은 이쿠는 안전한 사무분과가 아닌 전투분과를 지망했다. 그 이유는 바로 중학생 시절, 양화 대원에게 빼앗길 뻔한 그림책을 한 도서대원이 왕자님처럼 나타나서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순정적인 기억을 잊지 못한 이쿠는 자신도 그 대원처럼 '책을 지켜주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도서부대에 들어가면 그 왕자님을 한번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건 자기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꼬맹이' 귀신 교관 도조... 더구나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엘리트 출신 동기와의 충돌... 도서관 내의 정치적 파벌의 등장...

<도서관 전쟁>은 무심코 집어들었다 큰 재미를 안겨준 책이다. 라이트 노벨로 분류되어 있고 실제로 애니메이션도 출시되어 있으니까 통념상 틀린 분류는 아니겠지만 사실 소설은 그보다는 드라마 소설이라는 쪽에 보다 가깝다. 작가의 말대로 9회로 한 시즌이 끝나는 연속극을 보는 듯한 전개와 재미를 안겨준다. 일본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춤추는 대수사선> 같은 수사물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설정만으로는 형사물은 아니고 밀리터리물에 가깝지만 군사부대의 전쟁 이야기에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이쿠가 속한 '도서특수부대'는 긴급시가 아닌 평소에는 일반 도서관원의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사무직, 유사시에는 전투원에다 관료제의 구속 안에 놓이는 공무원이 겹쳐진 형사라는 이미지에 더 유사할 듯하다. 여기에 도서관 내 파벌과 문부성, 법무성, 양화 위원회가 얽힌 정보전까지 겹쳐지며 흥미진진하다.

더하여 '도서관 전쟁' 시리즈는 심지어 '키다리 아저씨' 류의 로맨스 소설의 속내를 가지고 있다. 어디가 로맨스 요소인지는 스포일에 해당되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지만 좌우간 '로맨스가 빠지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기 마련인' TV 드라마의 이야기에 속성상 상당히 가깝다. 한국인의 미니시리즈 감성으로 보아도 상당히 쉬이 읽힐 듯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반적인 라이트노벨보다 훨씬 덜 마니악하고 일반 대중에게 호소할 만한 작품이다. 호감을 얻을 만한 캐릭터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하여튼 설명하기보다 직접 읽고 재미를 느끼기에 더 좋은 책이니 일독을 권하고 싶다. 현재 <도서관 전쟁>, <도서관 내란>이 한국에 출간되었고 이제 <도서관 위기> <도서관 혁명> 두 권이 남았다. 나머지 두 권도 곧 번역되지 않을까 싶다. 굉장히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엔터테인먼트 작품이고, 마음을 뒤흔드는 포인트도 곧으면서 불쾌하지 않다. 즐기기 위한 소설은 이래야 한다- 고 할까.

이건 좀 다른 이야기..

2008/10/09 06:13 2008/10/09 06:13
article 2008/10/09 06:13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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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당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소설"이라는 평가를 들을 작품도 있다. 그런데 <밤은 짧아 걸아 아가씨야>는 전자는 아니지만 후자라고 딱 잘라 말하기에도 뭣하다. 그것은 이 소설이 문단의 욕망이나 현실의 욕망을 그다지 개의치 않고 소설적인 재미와 캐릭터 그 자체를 지향하는 순정한 에너지로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순정하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말이 아니다. 뭔가를 이루어내려는 작품의 경우, 반드시 어딘가에서 억지를 부리기 마련인데, "역사에 남을 작품"을 지향하는 소설에는 그 도착점에 가 닿기 위한 그 나름의 억지가 담겨 있다. "트렌드를 반영하는 대중 작품"을 지향하는 작품에도 역시 그 나름의 억지가 있다. "감동을 쥐어짜려는" 신파극에서 억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성을 지향하는" 작품에서도 그 나름의 억지가 반드시 발생하기 마련인 것이다. 신문 문예 단편들이 드러내는 억지스러움은 누구라도 알고(심지어 작가조차도) 알고 있을 터. "소설가의 감성과 자아를 독자에게 들이대려는 소설"의 억지스러움은 말해 무엇할까.

목적이 있는 작품은 해당 매체와 예술 형식을 혹사시키기 마련이다. 그 혹사로 인한 충격은 고스란히 어디엔가 누적된다. 잘 쓰는 작가일수록 이런 억지스러운 부분을 각종 기교로 잘 감추어내지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눈에는 결국 들통나기 마련이고 처음에 들통나지 않는다고 해도 되풀이 읽다보면 결국 속살이 드러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부분들이 최소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고, 심지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유쾌하게 넘어가게 만든다는 점이 멋진 것. 자연스럽고 거침없으며, 뭔가를 이루어내려고 하는 욕망이 최소화되어 있는 동시에 '좋은 소설'인 것이다. 이것이 작가 특유의 망상 파워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게 시시껄렁하게 읽히지 않은 것은 한 차례 기분 좋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모던 판타지가 얼마나 멋지게 약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며, 독자의 호감을 크게 얻어내는 힘을 가진 로맨스이기도 하다.

홍대 주차장 거리에서 7000원에 팔기에 샀는데, 어쩌면 올해의 베스트 중 하나로 꼽게 될지도 모르겠다.

2008/09/30 18:31 2008/09/30 18:31
article 2008/09/30 18:31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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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형의 신화, 수퍼 히어로
<다크 나이트> 영화와 함께 출간된 배트맨 만화들

바로 얼마 전에 개봉한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는 국내에서 수퍼 히어로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새로운 각도를 더해주었을 법 하다. 미국 코믹스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팀 버튼의 <배트맨>부터 이어진 이전 시리즈와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다크 나이트>를 대조해 보며 이런 소박한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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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 영화에 등장한 ‘조커’가 맞는 거야? 아니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조커’가 맞는 거야?” 어떤 것이 ‘배트맨’ 원전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이다. 혹은 영화 속에서 ‘투페이스’가 만들어지는 기원은 사실 코믹스의 설정과는 사뭇 다른데,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투페이스’는 진짜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능할 터다. 아직 한국에 수퍼 히어로 만화를 접해본 독자가 꽤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운 부분이다.

최근 <다크나이트>의 개봉에 맞추어 몇 개의 배트맨 만화가 국내에 번역되었다. 일단 짐리의 <허쉬(Hush)>와 조지 프랫의 <Harvest Breed - 악마의 십자가>가 영화 개봉 전에 출간되었다. 미국 수퍼 히어로물의 역사를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고전,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도 이제 국내에서 만날 수 있다. 모두 멋진 작품이니 독자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이런 수퍼 히어로 만화를 감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수퍼 히어로 만화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식의 ‘원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트맨은 밥 케인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배트맨의 모습이 밥 케인의 그것과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 활동에서 은퇴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배트맨을 지나간 전설로 여기게 된 시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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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허쉬>에 등장하는 배트맨은 아직 젊고 건강하며, 투페이스와 조커 외의 새로운 악당, ‘허쉬’의 도전에 직면하여 복잡한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 나가고 있다. <Harvest Breed>의 배트맨은 퇴마술사 같은 면모까지 보인다. 흑마술에 의해 악마가 탄생하려 하고 배트맨은 자기 안의 악마와 함께 외부의 악마와 싸워야 한다. 이 경우 영화와 마찬가지로 어느 쪽의 배트맨이 ‘정답’인지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배트맨은 DC 코믹스에서 관리하는 수퍼 히어로 캐릭터이고, 이 캐릭터의 배경과 성격, 동료들, 악당들은 수많은 스토리 작가/작화가에 의해 변주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테네의 탄생 설화나 여신의 성격이 각 신화의 판본마다 혹은 해석자마다 미묘하게 다른 면을 보이듯이 배트맨 역시 스토리 작가와 작화가에 따라 다각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에도 배트맨이나 X맨 등 수퍼 히어로 시리즈는 해마다 새로운 작품이 더해지면서 세계관이나 캐릭터 모두 복잡하게 발전하고 있다. 물론 공식 스토리와 외전의 구분은 존재한다. <Harvest Breed>는 배트맨의 기존 설정은 크게 흐트러트리지 않으면서(즉, 새로운 히어로를 등장시키거나 사망시키지 않으면서) 배트맨 만화를 새로운 장르로 그려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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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스토리는 공식 스토리라기보다 외전격이라 할 수 있는데 배트맨이 환갑이 되었다거나 새로운 소녀 로빈이 등장한다는 것은 거의 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랭크 밀러가 이 만화에서 구축한 배트맨 캐릭터의 해석은 이후의 배트맨 코믹스에 영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본 스토리는 중요하고 외전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배트맨을 비롯한 수퍼 히어로물은 현대에 생성 중인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수퍼 히어로 시리즈처럼 ‘배트맨’ 시리즈의 세계도 시대에 맞게 구축과 재구축을 반복했고 가정과 사실을 포괄하며 가지를 뻗어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영화도 그 중 하나다. 때로는 작품 간 설정에 서로 모순이 생기고 새로 등장한 설정이 이전 작품의 설정과 일치하지 않는 수도 있는데, 제작사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설정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해석을 그 자체로 즐기는 자세도 역시 중요할 것이다. 이런 작품 간의 비교적 느슨한 연계가 수퍼 히어로물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동국대학교 신문, 쓴 건 8월 24일이었는데 며칠 자에 게재되었는지는 모름)

2008/09/29 18:58 2008/09/29 18:58
article 2008/09/29 18:58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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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로는 SF로 불림직하지만 장르 클리쉐보다는 문학 클리쉐를 따르는데 더 집중하는 작품이 몇몇 있는데 <로드>도 그런 소설의 분류에 들어갈 것 같다. 이 소설을 한문장으로 요약해보려 하니 <스탠드>의 <메밀꽃 필 무렵> 버전이든가, 스티븐 킹이 노벨문학상을 받으려고 작정하면 쓸 법한 소설이라는 등의 문구가 떠오른다.

<로드>는 소위 말하는 '문학적'인 소설이고, 카피 문구대로 '묵시록적' 혹은 '예언자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다른 카피 문구에는 '미국 현지에서는 성경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실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약 냄새가 풍기는 건 사실이다. 그래, 분명히 잘 썼지. 실존주의적으로도 읽히고 장르적으로도 읽히고, 로드물로도 읽히고, 신학적으로도 읽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히니까 말야. 심플하게 썼지만 풍부하게 읽히도록 고안되어 있는 문장이고 말야. 시점 선택도 훌륭하지. "남자는...OO했다" "소년은..OO했다" 객관화해서 덤덤하게 따라가도록 말야. 그러다 가끔 울컥 하는 대목 살짝 넣고 다시 덤덤...하다가 또 한번.....

<로드>는 미국인들이 정말 좋아할 소설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의 유대-컴플렉스가 구현되어 있다고 할까. 미국인 부자 두 명이 유랑하며 말 그대로 구약적인 체험을 한다고 해도 좋겠고. 희망 없이 힘겨운 고행을 해서 신의 구원을 받고아 말겠다는 민족-고난에 대한 갈망? 그런 의식이 소설 전면에 카타르시스적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그걸 아버지가 아들을 챙기는 내용으로 풀어가는데 이거야 말로 미국애들이 정말 좋아하는 내용이니까 말이지. 그러고보니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우주전쟁>처럼 말야. 좌우간, 소설 단행본 띠지의 카피 문구를 요리조리 잘 요약해보면 "미국애들이 환장하는 소설"이라는 이야기로 압축될 수 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정말 그런 요소들로 가득 차 있더라.

그런데 이 소설이 한국에서 왜 많이 팔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 결론부의 '좀 신학적인' 내용도 사실 이 나라에는 그다기 크게 와닿을 것 같진 않은데. 이 소설이 지금,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조신하고 보수적인 줄 알았던 누나가 타이즈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한 그런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소설의 가장 대중적인 부분조차도 아주 아메리칸 스타일이고 미국애들이 열광하는 요소들은 대체로 한국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거든. (그게 가능했으면 스티븐 킹 소설도 많이 팔렸어야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결국 이 소설의 '감성류 소설적인 부분'을 마케팅에서 최대한 활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이 고난의 여행을 떠나서 끝에 소량의 구원에 이르는 휴머니즘 소설"로 읽을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니 한국 표지가 미국판 표지보다 더 뭐랄까, 쌉싸름하다.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감성 소설과는 크게 달라서, 이 황량한 느낌은 결국 포장하기 힘들다. 감성류 소설이려면 좀 더 알기 쉬워야 하니까.

하여튼 <로드>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 차트에 오르긴 했지만 그걸 이 소설의 특정한 부분이 한국인의 감성에 크게 어필한 결과라고 해석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소설을 읽어서 손해날 일은 당신에게 하나도 없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띠지 문구들과 책 디자인. 출판사의 "미국 현지 내에서 끝내주는 평가를 받는 엄청나게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는 광고, 그리고 '인정 소설'출판사의 물량공세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은가 싶다. 확신에 찬 마케팅과 물량공세는 고래도 책을 사보게 만든다. - 라는 교훈인지도.

p.s 결말부를 보면 이 소설은 분명, "좀 더 과감한" SF/판타지 소설 버전으로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소년은 에스퍼가 되어.. 역시나 스티븐 킹의 <스탠드>가 된다 결국.
2008/09/17 19:03 2008/09/17 19:03
article 2008/09/17 19:03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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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 알렉스 로스 외 (1, 2,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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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진 같은'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더랜다. 그런데 마침 1권을 지인이 가지고 있기에 지하철에서 훑어 보다가 "어라? 재밌네?"하고 2, 3권을 사서 집에서 읽던 중에 빠져들어 버렸다. 아, 난 이렇게 여러 '능력자'가 얽히고 섥히는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것이다. 하여튼 이 미국 만화에는 DC의 "저스티스 리그"와 그에 대항하는 악당이 총 집결해서 등장한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꽤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DC의 히어로/빌런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입문용 기회기도 하다. 나름 꽤 즐겼다.
다 읽고 난 감상은 "그린 랜턴 짱!" "자타나 짱!"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그린 랜턴은 아직 읽어본 게 없었다. 히어로 설정 사이트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정신을 물질로 구현하는 계열의 히어로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인데 이 작품에서 스토리 작가가 그린 랜턴의 비중을 대단히 높여놓기도 해서, 덕분에 아주 좋았다. 크립토나이트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는 수퍼맨이나 타인에게 정신 조종당하는 수모를 겪는 배트맨, 치타에게 할퀴어지는 원더우먼보다 맘에 드나.

<저스티스>에는 마법사 계열 히어로(정확하게는 히로인)인 '자타나(Zatanna)'가 아주 매력적으로 나온다. 이 만화에서 그려진 자타나의 스타일이 좋다는 거여서 그녀 자체가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중 그네> 오쿠다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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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동안 고향집(?)에 있으면서 읽을 책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사다 봤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이게 처음인데, 음. 괜찮았다. 아니, 읽는 동안 꽤 좋았다고 할까. 몇번씩 다시 보게 하는 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 교훈, 트렌드 감 모두 괜찮거든. 이런 삼박자를 모두 맞춰내는 것이 일본 대중 소설의 무서운 점이기도 한데, '양서'로 꼽힐 만큼 '해학적이고 바른' 작품이기도 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단점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런데 역시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사서 읽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는 거. 역시 취향 탓이겠지만.

하지만 누가 빌려주면 역시 읽게 될 법한. 난 역시 좀 다크한 맛이 없으면 만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잔혹한 걸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야.



<이누가미 일족>
요코미조 세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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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조 세이시의 고전. 이 작품의 영화화가 크게 히트한 것이 소위 소설을 미디어믹스해서 팔아먹는 가도카와 상법이라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읽은 건 처음. 미스터리 장르 자체에 특별한 애착이 없는 탓인데,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도 직접 읽어본 건 처음이다. 괜찮군 - 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다지 큰 감흥은 남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교고쿠 나츠히코의 <우부메의 여름> 같은 작품이 이런 작품의 직접적인 후계작이자 업그레이드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모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 괴기스러움. 기타 등등. 그 유명한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캐릭터에 대해서는 흠 글쎄. 이 시리즈는 이 작품 하나만 읽어본 거지만, ... 살해당할 사람 다 살해당하고 나서 문제를 풀어내는 건 그 손자 김전일하고 크게 다르지 않잖아? - 라는 생각. 다른 감상으로는, 전후 일본의 귀환병 중에서 "멀쩡하게 돌아온 착한 군인"과 "망가져서 돌아온 나쁜 군인" 사이에 전자가 미인을 차지했다는 이야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이건 스포일이군)

추리 자체는 꽤 유추 가능했다는. 장면 구성이나 캐릭터가 아주 깔끔해서 연극으로 꾸며지면 크게 재미있겠다 싶기도 하다. 분명 연극도 있겠지.

뭐, 그렇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니 최근 매체 용의 글 외에 개인적으로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긴 적이 없다. 역시 일을 하게 되면 사적인 글은 잘 안 쓰게 되나부다. 이런 걸 적는 이유도 지금은 백수이기 때문이겠고.

2008/09/16 03:54 2008/09/16 03:54
article 2008/09/16 03:54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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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The Twilight Saga) 시리즈’는 어찌 보면 아주 전형적인 학원 로맨스물이다. 흑발의 여주인공 이자벨라 스완(이하 벨라)은 어머니의 재혼으로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기로 결정, 포크스라는 시골 마을로 전학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살던 곳인 피닉스와는 달리 벨라는 가는 곳마다 남학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벨라는 특별한 운명과 직면하는데, 바로 뱀파이어 남학생과 연인 사이가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장 잘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에드워드는, 처음에는 벨라를 멀리하고 혐오스럽다는 듯 자리를 피하는 남학생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벨라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흡혈 충동’을 피하려는 행동이었다. 이 ‘흡혈 충동’은 결국 벨라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으로 벨라 역시 에드워드에게 겉잡을 수 없는 매혹을 느낀다. 벨라는 에드워드의 연인이 되고 어느새 뱀파이어 일가족의 ‘승인’도 받는다.

뱀파이어 시리즈는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손해 볼 것 없는 존재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햇빛을 받는다고 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햇빛을 받으면 온 몸이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에 피할 뿐이다. 불편한 부분은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신분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는 것, 인간 사회 속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흡혈 충동을 견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에게 영혼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는다는 점 정도랄까. 이 정도면 뱀파이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초자연적인 능력에 인간 이상의 아름다움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에드워드보다 늙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벨라는 이미 뱀파이어가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절대 여자친구를 뱀파이어로 만들 생각이 없다. 이 친구 여자친구 사랑이 정말 대단하여, 스킨쉽을 할 때마다 자제력을 잃을까 두려워 스스로 ‘수위’의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을 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젠틀한 남자, 지상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완벽한 남자친구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시리즈의 1권 <트와일라잇>은 사뭇 전형적인 학원 로맨스물을 연상시키는 플롯에 TV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속도감을 더했다. 특히 1권은 속도감과 전형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결과물이다. 사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독특한 소재인 ‘뱀파이어’ 그 자체 역시 그다지 창의적인 요소는 아니어서 로맨스와 뱀파이어 소재의 결합은 여성향 판타지 소설에서 그리 드문 공법은 아니다. <어두워지면 일어나라> 를 위시한 샬레인 해리스의 ‘남부 뱀파이어 시리즈’는 뱀파이어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침대에서 사뭇 다르다’라고 거침없이 묘사하고 있다. 뱀파이어에게 인권이 주어진 시대를 배경으로 어둠의 존재를 사냥하는 해결사를 그려낸 ‘뱀파이어 헌터 애니타 블레이크 시리즈’의 애니타는 그녀를 강간 혹은 사랑하고 싶어하는(이 두 가지를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비인간 남성들에게 둘러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시리즈 후반에서 애니타는 늑대 인간 남자친구와 사귀게 된다.

무엇보다 여성향 뱀파이어물의 클래식인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시리즈가 있다. 이 소설 속의 남성 뱀파이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 질시하고 숨쉴 새 없이 쾌락과 정열을 추구한다. 시리즈 1권에 해당하는 닐 조던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역시 게이 컬쳐에 대한 묘사를 다루고 있지만 소설은 훨씬 여성향에 가까워서, 특히 뒷권으로 갈수록 적나라한 야오이 소설에 가깝게 변해버린다. 한 마디로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여성향 로맨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최고의 향신료로 쓰인 숨은 역사가 있다. 여성들은 언제나 뱀파이어를 괴물보다는 완벽한 인간(남성)으로, 제약보다는 더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존재로 틈틈이 개조해왔다. 여성이 떠올리는 ‘뱀파이어’는 노동계급의 삶을 착취하는 귀족의 존재로 그 파워만큼이나 많은 제약을 짊어지고 한눈에 드러나는 괴물의 외모를 지닌 남성들의 ‘흡혈귀’와는 사뭇 다른 존재인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이미 5천만 부 이상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해리 포터 이후 최고의 영 어덜트 소설로 입지를 굳혔다. 이 소설의 전형성과 속도감, 그리고 적당한 신선도와 로맨스 플롯은 젊은 취향에 크게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며, 뒷권으로 갈수록 더 탄탄한 구성을 보여준다.

<트와일라잇>은 2007년 초 국내에 이미 1권이 발매된 바 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다. 대중과의 접촉 경로가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첫 권 <트와일라잇>이 제작 중이며 올해 12월 개봉 예정이며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해마다 각 권을 영화화하여 개봉하는 전략을 취한다니 이번에는 출판사로서도 크게 기대할 수 있을 듯 하다. 그 덕분에 2권 <뉴 문(New Moon)>이 출간되면서 1권도 다시 새로운 표지로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완벽한 남친’ 에드워드 역을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서 세드릭 디고리 역을 맡은 로버드 패틴슨이 맡았다니 ‘아름다운 뱀파이어 일가족’과 벨라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2008/09/08 06:05 2008/09/0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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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모어》 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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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미완 / 대원씨아이 / 야기 노리히로

과거 《엔젤전설》이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건지 천사 같은 건지 헷갈리게 하는 타이틀을을 달고 나온 만화가 있었다. 실제로 이 만화는 타이틀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마음은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천사 같지만 외모는 최대급으로 흉악한 악마 같은 고교생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년이 엄마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지으려고 노력하면), 아이는 경기를 잃으키고 기절한다. 학교에서도 주변 학생들은 부들부들 떨고, 불량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지레 맞짱 대결을 신청한다. 이런 대결에 한 두 번의 우연찮은 사고가 겹쳐, 사람을 패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벌써 학교의 짱이 되었다. 더욱 불행(한 건지 행복한 건지)한 점은 본인에게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어서,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오늘도 그는 선행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 주변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며 ‘전설’이 된다. 《엔젤전설》은 정말 웃기는 로맨틱/액션 감동 코메디물이었다.
《클레이모어》는 《엔젤 전설》을 그린 바로 그 작가, 야기 노리히로의 근작이다. 요괴가 등장하는 정통 판타지 물로, 인간처럼 가장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가 존재하는 세계이고 그 요괴를 사냥하는 인간, ‘클레이모어’가 등장한다. ‘클레이모어’는 모두 반인반요의 젊은 여성들로, 요괴의 생체조직을 어린 여아의 몸에 이식하여 만들어낸 여성 검사들이다. 모두 ‘클레이모어’(일종의 대검)을 들고 다녀 클레이모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그 클레이모어 중 한 명인 클레어가 요괴로부터 한 소년을 구해주고, 함께 요괴 사냥을 다니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사실 《엔젤전설》의 인기가 너무 괜찮았기에, 전형적인 로드물로 시작하는 《클레이모어》는 그저 그런 작품으로 보였다. “코메디는 어디 간 거야. 그 사람 미치게 하는 코메디가 없잖아. 역시 이 작가는 코메디를 해야 해….”라고 생각한 것이 비단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 이다. 만화의 초반 권들은 클레어와 소년이 요괴가 숨어 사는 마을에 도착하여 인간 사이에 숨어 사람을 해치는 요괴를 색출하는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누가 요괴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결하는, 그리 나쁠 것도 특별히 좋을 것도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를 8권 정도까지 읽은 사람들은 뜻밖의 보상을 받게 되는데, 요괴와 클레이모어를 아우르는 좀 더 굵은 이야기를 펼쳐 내기 시작하고 각자의 사연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여 충실하고 매력적인 대하-판타지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클레이모어 간의 좀 더 직접적인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힘의 서열로 클레이모어 중 최하위권인 클레어가 점점 강해지며 또 다른 클레이모어들이 얽혀든다. 생각해보면 야기 노리히로의 힘은 《엔젤전설》부터, 센스라기 보다 연출의 성실성과 작은 매력을 하나하나 쌓아올려서 만들어내는 견실함에 있었는데, 바로 그런 힘으로 《클레이모어》는 《엔젤전설》의 아성을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작품으로 성장했다. 이런 식의 기분 좋은 배신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작품이 연재 도중 훌쩍 성장해버리는 체험은 독자로서는 그 이상이 없을 정도다.

(판타스틱 9월호)

2008/08/19 17:17 2008/08/1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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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x헌터] 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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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미완 / 학산문화사 / 토가시 요시히로

만화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누군가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려도 별 재미가 없는 반면, 대충 뎃생만 해놔도 재미있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마감을 지키지 못해 잡지에 ‘콘티 수준의 작화’를 게재하는 일이 있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본지의 권교정 작가가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런 만화도 있다. 결국 만화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이다.

이런 케이스로 가장 유명한 작가는 바로 토가시 요시히로인데, 그는 《유유백서》를 통해 히트 작가로 발돋움한 후, 1998년부터 《헌터x헌터》를 연재하기 시작, 초반에는 꽤나 괜찮은 퀄리티의 작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 페이지에 쓰인 장면을 복사해서 다음 페이지에 다시 사용하거나 꼭 필요한 컷에만 배경을 그리는 등 불안감을 조성하더니, 급기야 작화가 덜 끝난 상태의 원고를 잡지에 연재하고, 언젠가는 아예 대사와 지문만 쓰여진 콘티 상태의 연재분을 게재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단행본은 추가 작업을 해서 출간되고 있지만, 이 정도면 아무래도 좀 심하다.

그런데 문제는 ‘콘티 상태라도 좋으니 다음 화를 내놓아라’라는 독자가 상당한 숫자로 존재한다는 것. 그런 상태로라도 잡지에 실린다는 것은 그 작품의 게재 여부가 잡지의 판매부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로, 인기작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토가시는 너무 불성실을 남발한 셈이어서 “아들의 고교 입시 때문에 당분간 연재를 중단하겠다” 했을 때는 꾹 참고 1년 반을 버텼던 독자도 “《드래곤 퀘스트》(게임)를 해야 해서”라며 다시 몇 주의 휴재로 돌입했을 때는 결국 실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화란 참으로 위대한 예술이어서, 다음 화가 나오고, 다음 단행본이 나오면 또 사서 보게 된다. 작가가 죄지, 작품이 무슨 죄냐는 심정일까.

《헌터x헌터》는 조금만 더 성실하게 연재했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인기 있었을 작품이다. 고유의 능력을 가진 ‘헌터’들과 ‘능력을 발휘하게 위해 클리어해야 하는 조건’이라는 요소는 많은 팬들을 열광케 한 요소였다. 《드래곤볼》 식의 수치로 환산되는 전투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강한 능력을 발휘하게 위해서는 많은 제약을 짊어져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보다 영리한 소년만화를 갈구하는 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년 반 이상이나 휴재하는 동안 작품의 방향은 불투명해졌고, 연출도 느슨해졌다. 독자들은 여전히 작품을 사랑하지만, 체념의 경지에 도달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헌터x헌터》의 24권은 작가가 독자를 길들인 증거물로, 215페이지에 불과한 이 한 권은 실상 빈번한 휴재와 불성실한 연재로 가슴 졸이게 한 눈물의 산물이다. 첨언하자면 토가시의 부인은 ‘세일러문’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다케우치 나오코이고, 본인이 만화로 벌어놓은 돈도 충분해서 먹고 살려고 만화를 그리는 작가도 아니니 이건 뭐 할 말이 없다.

(판타스틱 7월호)

2008/07/17 01:34 2008/07/17 01:34
article 2008/07/17 01:34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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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고 나서는 "그래도 괜찮지 않았나"하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재앙이었다"라는 의견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시네21에서 이 영화에 '모든 평자가' 별 넷을 몰아준 것은 한 마디로 '음악 판타지'가 눈을 흐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못하겠다. 생각해보니 음악 영화 치고 평점 낮게 받은 게 없다. 특히 '뭔가 작가주의 음악가'를 찍은 영화라면 더 그렇다.

이를테면 빔 벤더스의 '더 블루스' 같은 영화에 '백인 지식인의 흑인 선망' 이 진하게 묻어난다거나, 흑인 수난사에 대한 백인의 죄책감이 오히려 '숭배'로 전환되는 심리가 보인다거나 하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음악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 음악인에 대한 존경과 찬사가 영화에 대한 평가를 대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레이' 같은 꽤 진부한 영화에 대해서도, 레이 찰스의 '힛 더 로드 잭'이 흘러 나오기만 하면 평자는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와, 역시 지금의 립싱크 가수들과는 다른 진정한 음악.." 물론 좋은 음악이다. 좋은 음악은 언제나 별처럼 널려 있으니까.

음악 영화, 혹은 음악 영화에 대한 평가치고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아임 낫 데어'는 역시 마찬가지로 밥 딜런을 대놓고 신격화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다. "너는 음의 규칙 이전에 자유를 알고 있구나"라거나  "그는 진정한 우리 시대를 살았다" 같은 대사를은 홍보를 위한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정말 극중 대사다. 배우들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뇌까린다.

비슈누는 물고기, 거북, 멧돼지에서 시작하여 붓다와 깔낀 등 10개의 아바타로 현존할 수 있다고 한다. 딜런은 이 영화에서 비슈누와 동급이다.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6명인가 7명인가의 분신으로 분할된 밥 딜런의 캐릭터는 '한 명의 인생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무한성'을 증언하기 위한 감독의 장치다. 이런 건 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언급하는 밥 딜런은 대학생 레포트 정도의 깊이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을 6개로 분할하면 난해하고 불친절하고 머리가 아플 뿐이다.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유희이며, (요컨데 밥 딜런이 전기 기타를 들었을 때의 논란 같은 것은 록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파본 사람은 모를 수가 없다) 밥 딜런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이 불친절한 영화다(코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자가 실존 인물 누구에 해당하는지 관객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토드 헤인즈가 '벨벳 골드마인'을 만들었을 때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쇼다'라는 기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신파적인 대사들도 일종의 희극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임 낫 데어'를 보고 난 지금 생각해보니 토드 헤인즈는 정말로 보위가 디스코를 했기 때문에 '진정성을 배신'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녀석은 표피적인 체 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글램에 대한 굉장히 표피적이고 1차원적인 의견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왈, "보위가 그 영화 속에 내 이름자가 한번 이라도 나오면 소송걸겠다고 했던 게 올바른 대응이었던 거지"

록에서 글램 스타일이란 표피적인 것에 대한 찬양을, 혹은 과잉을 그 자체의 미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벨벳 골드마인'의 표피성과 과잉 역시 의도적인 스타일로 보였다. 그 영화는 꽤 괜찮은 착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임 낫 데어'는 속아 넘어가줄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이 영화는 (영상에 헷갈리지 않는다면) 2시간 내내 '그는 신입니다. 한 사람 안에 그렇게 많은 재능이 있을 순 없기 때문이죠'라고 중얼거리는 게 다다. 토드 헤인즈는 이 대사를 2시간 내내, 불필요한 아트 스쿨 형식과 패션 잡지 화보 영상, 비효율적인 시적 언어로 변주하고 있다.

요약해서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과 흑인 꼬마를 제외하고 나면, 밥 딜런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스타일과 찬사가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라이크 어 롤링 스톤'과 '아임 낫 데어'에 귀기을이며 가사 번역 자막을 끝까지 응시하느라 자리를 뜨지 않는 충실한 관객이 있다.
2008/06/11 19:04 2008/06/11 19:04
article 2008/06/11 19:04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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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 3권
1~3 미완, 서울문화사, 요시나가 후미

요시나가 후미라는 작가는 특별하다. 개인적으로는 작가 이름만 보고 주저없이 단행본을 사버릴 정도다. “이번 작품은 실망이었어요”라는 대사는 어떤 작가에게든 통하기 마련이거니와 후미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 물론 《서양골동양과자점》이 가장 히트작이고 완성도가 있는 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라워 오브 라이프》가 범작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 태작이라고 하면 빰을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소품 격 작품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후미가 실망을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품에 ‘야심’을 부리지 않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후미의 작품은 동성애물 취향을 내포한 여성취향의 드라마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로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겠다’라거나 ‘인간성에 내포된 어둠을 보여주겠다’라거나 하는 작가적 야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골동양과자점》처럼 “자, 여기 꽃미남 3인방에 일하고 있는 제과점이 있다”라는 식의, 다분히 여성향 동인지 취향의 쾌락적 설정을 중시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후미가 캐릭터 드라마에 대단히 뛰어난 작가라는 점에 있다. 인간이 무엇 때문에 울고 웃는지를 후미만큼 솜씨 있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드물다. 때문에 결국 이 일련의 ‘여성 취향 게이물’은 보편 인간의 마음을 진술하는 이야기로 읽혀버리는 경지에 도달하고야 만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만큼 우리를 진동시키는 것이 없으며, 작품의 심도 같은 것은 여기에 붙는 장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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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3권이 발매된 《오오쿠》는 일련의 후미 작품 중 가장 독특하고, 비교적 ‘야심’이라 할 만한 것이 담긴 작품이다. 그 첫째는 후미가 무려 ‘시대물’을 그렸다는 것이다. 사극 매니아로 알려진 후미이니만큼, 이 사극 만화 프로젝트에 거는 의욕이 상당할 것은 틀림없다.  둘째는 이 시대물이 일종의 가상 역사물이라는 점이다. 일본에 인포면창이라는 질병이 유행하고 사내 아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일본은 여성들만 가득하고 사내는 귀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쇼군도 여자. 아, 그렇다면 남성 군주가 여성 후궁을 거느리듯이, 여성 쇼군이 거느린… 남자들이 있겠다. 남자 후궁들 말이다. 그런 미소년들을 모아놓은 장소가 바로 ‘오오쿠’. 여기까지는 참 페미닌하고 쾌락적인 설정이다. 그래, 여자 쇼군이 매일밤 미소년 중 누구와 동침할지 결정하는 ‘하렘물’이란 말이지.

하지만 어느새 우린 이게 ‘하렘물’이라는 걸 잊고 드라마에 몰두한다. 2권까지는 그렇다. 3권에서 후미는 《오오쿠》를 상당히 진지한 대체역사물 장르로 이동시킨다. 일본이 쇄국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남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가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마니악한 쾌락을 즐기면서도 보편의 가치에 민감한 독자들에게 후미는 절대적인 힘이 있다. 《오오쿠》는 거장, 후미의 경력에 일획을 긋는 뛰어난 작품이다.

(판타스틱 6월호)

2008/06/05 14:30 2008/06/05 14:30
article 2008/06/05 14:30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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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미완, 대원씨아이, 케모노기 야세이

어떤 만화의 경우 ‘평생 보게 되는’ 수가 있다. 일일 신문의 풍자 만화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꽃보다 남자》는 지금 30대 여성들도 중고 시절에 책상 밑에 넣고 몰래 보던 만화다. 이 만화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12년 동안 연재했으므로 15, 16세에 이 만화를 처음 접한 소녀가 26살에 완결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꽃보다 남자》도 언제 끝나는 거냐는 원성을 들은 초장기 만화지만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 일본 순정의 고전인 《유리가면》은 1976년 연재를 시작, 현재 마지막 몇 권을 남겨놓고 연재 중단 상태로, 아직도 이 만화의 종결부를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이 수두룩하다. 글을 막 깨친 8살 소년소녀가 이 만화를 보았다고 쳐도, 40살이 되어서까지 완결을 보지 못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이것은 “완결되지 않은 만화는 손도 대지 않는다”는 철학을 지닌 만화 독자에게는 끔찍한 악몽이다.

그러나 평생을 하나의 이야기와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아주 특별한 일에 틀림없다. 그래서 ‘인생은 곧 이야기’니까 말이다. 많이 에둘러 왔지만 케모노기 야세이(獸木野生)의 《팜》 역시 작가와 독자가 하나의 작품으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만화다. 《팜》의 이야기는 세 남자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제임스 브라이언이라는 천재 소년이다. 이 소년은 미국 최대 마피아 총수의 조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고 부친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삼촌은 비정상적인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두려워했고 급기야 죽이려 했으나 아이는 살아남아 적대 세력에 몸을 의탁, 이후 고의로 살인 미수를 저질러 교도소에 갇힌다. 다른 한 남자는 카터 오거스로서 카터의 어머니는 흑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아이(카터)를 낳기 전까진 자신에게 일본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때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1950년대로 자신에게 잽(Jap: 일본인을 가리키는 속어)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머니는 발광했다. 다른 한 아이는 앤디 글래스고우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 태생인 어머니와 동물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앤디는 어머니가 죽자 마음을 닫고 길들여진 사자와 함께 정글에 숨었다. 그는 어릴 때 꿈속에서 한 백인 남자아이를 보는데, 이후 그 아이는 제임스 브라이언인 것으로 판명된다.

《팜》은 숨막힐 듯한 고독과 이별, 인생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희생당하던 세 남자가 조우하여 한 집에서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카터와 브라이언은 공동으로 탐정 사무소를 차리고, 이 집에 카터의 먼 친척 앤디가 찾아온다. 그리하여 안정된 삼각형을 이룬 세 남자가 다른 구성원을 맞이하여 일종의 유사 인척 관계를 형성하는 《팜》의 중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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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팜》의 독자들은 주인공들이 몇 세에 어떻게 죽는지, 말년에 행복한지 어떤지, 자식은 몇 명을 낳는지 미리 알고 이 만화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작품 내용 중에 친절하게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당하지 않은 것은 《팜》이 ‘다음에는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려고 보는 만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매일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날은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 바다로 떠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팜》은 그렇게 알고 보아도 아름다운 일출같은 작품이다.

작가인 케모노기가 만들어낸 것은 일종의 커트 보네거트식 순정이다. 케모노기는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고독하고, 잔인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 세상은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휘두르는지 진지하게 고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짝을 만난 이들은 서로 시니컬하고 애정어린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음짓는다. 생명이란, 태어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걸 깨닫는 것은 아니다.

《팜》 시리즈는 1983년부터 연재, 몇 번의 연재 중단을 거쳐 아직도 발간되고 있다. 이 만화는 25살을 맞이했지만 한국에는 실질적으로 90년대에 소개되었으므로, 국내에는 10년 이상 이 만화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는 컬트적인 팬들이 있다. 하나의 작품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팬들이다. 《팜》은 최근 30권을 발간했는데, 이제 전체 예정된 10개의 에피소드 중 9번째의 에피소드에 진입했다.
 
* 작가 케모노기 야세이는 최근 이름을 바꾸었다. 팜 시리즈의 30권 이전의 작가 이름은 ‘타마키 신’이다. * 팜 시리즈는 리브로 코믹의 ‘재발간을 원하는 작품’ 투표에서 1위를 하여 최근 재발간되었다. 초반의 절반 이상이 품절이었던 상황이었다. 지금이 이 만화를 구입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판타스틱 2008년 5월호, 잡지에는 분량 문제로 반 정도로 축약되어 게재)
2008/04/28 16:38 2008/04/28 16:38
article 2008/04/28 16:38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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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형동의 《바이 바이 베스파》
(박형동, 애니북스)

박형동이라는 작가는 어느새 책의 커버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해졌다. 아마도 현재에도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인 《리버 보이》나 과거의 히트작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표지 일러스트를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혹은 《판타스틱》 2007년 12월호의 표지 일러스트는 어떤가. 박형동은 그런 것들을 그렸다. 하지만 박형동은 사실 만화가이고 만화팬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은 아는’ 작가에 속한다. 그가 다작이 아닌 편이어서 역시 ‘아는 사람만 이름을 기억’하는데 그치긴 했지만 그 아는 사람의 숫자가 의외로 적지 않다. 그리고 의외로 독자는 ‘특성이 있는 좋은 작품’의 경우는 직가 이름을 기억하거나 그 화풍이나 내용을 기억하고야 마는 편이다. 

1998년에 인디만화잡지 《히스테리》시절에 〈멸공 소년 새돌이〉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매우 인상이 남는 그림체였기 때문에. 당시 한국의 인디 만화는 거침없는(나쁘게 말하면 일부러 졸렬한) 풍자에 맹진하고 있던 때였다. 한 마디로 금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약간은 강박적인 강령으로 존재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매우 서정적인 만화를 그리는 그가 그 지면에 무엇을 그렸는지는 본 사람들만을 위한 추억으로 놔두자. 그러나 매우 재미있는 패러디 반공만화였다는 것은 말해두자. 

하지만 박형동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만화팬이라면 은근히 기억하고 있을 《야후 매니아》라는 잡지에서 박형동의 만화 〈바이바이 베스파〉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점에서 선 채로 눈시울이 벌개는 것은 하기 쉬운 경험은 아니다. 나는 그 때 슬슬 뭔가 계속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기만 하고, 나 역시 진부하게 늙어갈 것이다’라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듯 하다. 아직 꽤나 젊은 나이였지만, 징조가 보였던 것이다. 어느 샌가 불연듯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중얼거린다. “내가 아무 것도 없는 인간이면 어떻게 하지? 아무 재능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면….”

우리 세대는 처음으로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세대였기 때문에, 오로지 개인에게만 가해지는 그 불안은 그 이전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 말은 배수아의 아이들을 비롯하여 성장하지 않는 소년 소녀들이 가득한 시기였다. “난 아직 다 크지 않았어. 내 잠재력을 다 개발하지 않았어”라고 중얼거리며 성장을 유예하는 아이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그래서 다들 대학을 졸업하고도 어학연수를 떠나거나 대학원에 들어가서, “나의 가능성은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야”라고 필사적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그것은 자랑할 수도 없고, 스스로 자각하기조차 꺼려지는 사투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죄를 지은 심정이었고 〈바이바이 베스파〉라는 12페이지짜리 단편이 내게 보여준 구원은 말로 하기 민망한 것이었다. ‘베스파’(유명한 스쿠터의 일종)를 버리러 가는 소년에게 미키마우스(?)가 묻는다. “기타도 관두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이제 너에게 남은 건 전재산을 털어 산 저 베스파 밖에 없네?”

그런데 소년은 베스파를 팔려고 내놓은 길이었다. 한 때는 목숨을 걸고 기타를 쳤지만 내가 기타를 안 쳐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애정 결핍의 여자아이는 자신이 반드시 지켜주지 않아도 좋은 사람을 찾을 거라는 것을 알았노라고, 소년은 말한다. 그리고 소년은 베스파를 타고 편안하게 웃는다. 결국 2000년대 초는 자신의 꿈과 기대가 모두 좌절할 것을 알고도 지독하게 밝게 웃을 수 있는 힘을 요구했다. 우리가 ‘베스파’를 읽으며 그 작품을 기억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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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은 조금 늦게 도착하긴 했다. 이 때의 감성은 이 때에 가장 신선했고 이 때의 형식은 이 때에 가장 감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건데 이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나만은 아니었고, 그래서 이 책은 결국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작가라는 이의 주변에는 이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가 기억해주고, 누군가는 서점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작가가 있었지’하고 기억한다는 것. 이 단편집에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청춘이 다섯 편의 짧은 작품을 통해 새겨져 있다.

(판타스틱 2008년 4월호)

2008/04/14 18:42 2008/04/1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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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1년 전에 출간된 《소라닌》이라는 2권짜리 작품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작은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라닌》은 청춘군상들의 희망과 좌절을 현실적인 톤으로 그려내어 각광을 받았다. ‘소라닌’은 감자의 싹에 있는 독성 물질을 의미하는 말로, 만화 속 인물들이 결성한 밴드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소라닌’이라는 용어는 싹을 틔워봤자 보잘 것 없기는 마찬가지인 일본 20대의 삶에 대한 작가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사노 이니오는 희망 없고 변화 없이 아르바이트로 먹고 사는(프리터) 일본 청춘 군상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묘사로 이름이 높은 작가다. 《소라닌》에서 보여준 이런 힘은 《월간 선데이GX》에 2002~2004년 연재한 단편을 묶은 《이 멋진 세계》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아니, 오히려 그의 작가적 역량은 단편 쪽에서 더욱 돋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아사노 이니오에게는 구도에서 완전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뛰어난 공간 센스, 군더더기 없는 인물 묘사 능력이 있다. 미장센이나 몽타쥬 등, 대사나 지문에 의존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법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으며 환상과 현실을 적절히 배합하는 센스도 있다. 이 모두가 장편보다는 단편에 적합한 능력이다. 하지만 《이 멋진 세계》가 보여주는 더 중요한 특성은 한 인물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을 방지하여 이야기가 식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세련된 장치다.

18개 단편으로 템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장치의 일환이다.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등장인물을 다수 공유함으로서 서로 어깨걸이를 하고 있다. 우리는 1권의 단편〈반 더 포겔〉에서 밴드를 하겠다고 직장을 그만둔 호리타의 향방을 2권의 〈푸른 하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리타의 여자친구 마리코는 단순한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단편 〈멋진 세상〉에서는 마리코를 스쳐 지나가는 마리코 전 남자친구의 시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등장인물의 삶은 모두 이리저리 얽혀 있는데, 이러한 구성 덕에 독자는 한 두 캐릭터가 아닌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다중적인 시점에서 관찰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는 개별 단편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두 권짜리 단편집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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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삶에 결국 별다른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자기 인생의 초라함을 이겨낸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자신이 사회 속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가능성이 없는지 깨닫고 나면, 꿈은 순식간에 자신의 목을 조르는 독으로 변화한다. 결국 《이 멋진 세계》가 전달하는 메세지는 《소라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단편집에는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체험하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사이 자기 삶의 무게를 조금쯤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 [판타스틱] 2008년 3월호 게재

2008/02/15 15:59 2008/02/15 15:59
article 2008/02/15 15:59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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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 되어서도 여태껏 소년만화를 본다면 그건 자랑일까 아니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일까. 물론 이제 《블리치》는 유치해서 못 보겠고, 《나루토》의 우정 타령은 뭔가 닭살스럽다. 그나마 입맛에 맞는 《헌터x헌터》는 작가가 게임하느라 연재 중단이 일쑤…. 그런데 한국 소년만화는 없는 거야? 국내 소년만화계에 등장한 신인의 작품으로 《베리타스》를 꼽을 수 있다.

만화 《베리타스》의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믿지 않는 소년이, 어느 날 뇌호라는 이름의 초고수를 만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를테면 장풍)을 목격하고 그에게 몇 달 동안 무예의 비술을 배운다. 학원 폭력배의 세계에서 내공과 경공술로 상징되는 무공의 세계로 넘어간 셈이다.

그리고 이 인트로는 하나의 반전으로 완성된다. 몇 달 동안 뇌호에게 ‘뇌전소혼’이라는 무술을 배우고 헤어진 소년은 혼자 수련을 계속하던 어느 날 스승의 유골(불타버린 왼팔뼈)을 전해 받는다.

- 뇌호의 유골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따라오셔야 합니다.

이제 소년은 스승을 죽은 자들, 거대한 조직에 복수해야 한다. 이 인트로가 매우 한국적(?)이거나, 혹은 중국 무협소설적이라면 이후 만화는 일본식 학원물의 세계로 진입한다. 소년이 스승을 죽인 거대 조직(다국적기업)이 설립한 특수 고등학교에 중도입학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학생에게 인공적으로 합성한 기(氣)를 제공하며 ‘고수’를 양성해낸다. 당연히 교내에 2갑자, 3갑자 내공을 가진 전설의 고수가 즐비하다. 주인공은 이제 겨우 3개월 동안 배운 비술과 미약한 내공으로 교내의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베리타스》가 주목받은 이유는 물론 참신하고 흥미로운 스토리 구성과 세련된 플롯 장치, 이를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구현해내는 깔끔하고 화려한 작화다. 두 요소 모두 A급. 그러나 무엇보다 《베리타스》는 한국 대본소의 무협만화와 일본 학원물의 요소를 성공적으로 절충한, 최근 가장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이 만화는 한국의 토종 무협만화와 일본 만화의 재미, 그 양자를 통합하려는 신인 작가들의 야심찬 시도다. 《신암행어사》를 그린 양경일이 정통 무협만화인 문정후의 《용비불패》를 그린다면? 그런데 그것이 10대 학원물이라면? 아, 그대, 벌써 소년만화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나?

이제 처음에 제기한 질문에 답을 해보자. 소년만화는 소년이 보는 것이다. 맞다. 하지만 모든 여자의 마음속에 소녀가 있듯, 모든 남자의 가슴속에는 웅크린 소년이 도사리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가 한국인이며 동시에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란 이들이라면, 어쨌거나 우리가 만들고 소비해야 하는 한국 만화는 그 모든 요소의 절충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여하튼 《베리타스》는 당신이 한번 읽어볼 만한, 최근 급부상하는 국산 소년만화다.

(판타스틱 2008년 2월호)

2008/02/03 17:00 2008/02/03 17:00
article 2008/02/03 17:00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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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로의 사이키델릭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는 영국 TV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는 교통사고를 당한 형사가 어느새 영국의 70년대로 이동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라, 타임 슬립? 이것이 과연 현실인가 아니면 교통사고를 당한 채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자신의 두뇌 속에 벌어지는 환상에 불과한가가 주요한 테마가 되는 것이죠. 형사인 샘 타일러가 마주한 70년대 초의 영국은 한국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경찰이 주먹으로 용의자를 두들겨서 사건을 해결하는 사회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영국도 한국과 별반 다를 건 없었구나, 하고 안도하게 되는데요, 하여튼 샘 타일러는 자신이 추격하던 살인사건과 동일한 케이스를 환상 속(혹은 1970년대)에서도 마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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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바로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라이프 온 마스(Life On Mars)〉. 차에 치인 상태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이 곡은 그대로 2000년대와 1970년대의 영국을 매개하는 타임 슬립 장치가 됩니다.  이 노래의 작곡자이이며 가수이기도 한 데이빗 보위, 그가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는 비교적 유명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1969) 같은 노래가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붐을 타고 미국에서 소규모 히트하긴 했지만, 록커로서의 전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보위는 〈Comme d'habitude〉라는 프랑스 노래의 영어판 제작을 의뢰받게 됩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유명 가수 폴 앵카가 같은 프랑스 노래의 권리를 사들인 후, 멜로디를 차용해서 그 유명한 〈마이 웨이(My Way)〉를 작곡해서 발표합니다. 이 노래가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그 유명한 〈마이 웨이〉입니다. 결국 보위의 버전은 햇빛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셈이었죠. 좌절하는 보위였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보위의 다음 앨범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가 속된 말로 ’대박‘을 치고, 그는 이제 글램록의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보위는 다음 앨범을 통해 <마이 웨이>에 밀려 내놓지 못한 자신의 작업물을 ‘재작곡’해서 오리지널로 출시합니다. 그 노래가 바로 〈라이프 온 마스〉입니다. 그것이 바로 1973년, 드라마《라이프 온 마스》의 샘 타일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깨어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곡을 들어보면 〈마이 웨이〉와 코드진행이 꽤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은 출생에서 나온 쌍둥이 같은 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마이 웨이〉는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가련다’라는 중산층 중년 남성의 페이소스가 담겨 있다면, 〈라이프 온 마스〉는 정확히 그 대극에 위치합니다. 가사를 보세요.

“이건 자그마한 머리의 소녀에겐 정말 끔찍하고 자그마한 사건이야”
(It's a god-awful small affair to the girl with the mousy hair)
“그런데 엄마는 ‘안 돼’라고만 소리치고 아빠는 나가라고만 하지”
(But her mummy is yelling "No" And her daddy has told her to go)
“친구는 없고 그 애는 침몰하는 꿈 속으로 걸어가고 있어”
(But her friend is nowhere to be seen Now she walks through her sunken dream)
“엉뚱한 남자를 두들겨 패는 저 경관을 보라지”
(Take a look at the Lawman Beating up the wrong guy)
“저기 화성에서도 삶이라는 게 있을까?”
(Is there life on M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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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했듯이 1969년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이 시기는 Science Fiction(SF 소설)의 전성기 중 한 시기이기도 해서 로저 젤라즈니나 어슐러 르 귄 등이 ‘급부상하는 작가’였습니다. 보위 역시도 이런 SF 컨셉트를 음악에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뮤지션입니다. 특히 ‘화성’을 자주 언급하는 편인데,〈라이프 온 마스〉 가사에는 보위가 말하는 ‘화성’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바로 1970년대 초입의 영국입니다. “왜 화성이냐?”. 보위에게는 이 시기의 영국이 리얼리즘의 틀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혼돈에 쌓여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드라마 주인공도, 바로 그 ‘화성’으로 날려가버린 것입니다. (농담이지만, '살인의 추억'도 '화성'과 관계가 있네요)

결국 《라이프 온 마스》는 영국인들의 시대적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샘 타일러는 70년대의 영국에 도착하여 ‘경찰 윤리도 인권도 없는’ 상황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마치 다른 행성에라도 온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보위가 데뷔하는 70년대 초입부터 70년대 말은 영국 대중문화가 최고로 활성화되었던 시대입니다. 70년대 초반에는 보위가 글램록(Glam Rock)의 성자로 등장하여 영국 음악의 미래적 경향성을 드라마틱하게 정의했고, 70년대 말에는 섹스 피스톨즈에 의한 런던 펑크가 시작, 이후 세계 록씬의 판도를 영구히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현재의 영국은? 별다른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위가 ‘화성’이라고 노래한 바로 그 시대는 영국의 혼란스러우며 흥미로운, 그러면서 ‘최고로 모던’했던 한 시대입니다. 영국인들의 ‘대중문화 감성’은 사실 이 시기에 아직도 고정되어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그 시기에 태동하여 찬연히 빛났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에는 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담겨 있고, 드라마가 이 노래를 차용할 때, 그것은 아주 매끄러운 장치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샘 타일러는 자신이 1973년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말합니다. “내가 미쳤거나, 교통사고로 인한 코마 상태이거나, 실제로 시간여행을 했거나 셋 중 하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난 어떻게든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1973년이야 말로 영국인에게는 일종의 ‘집’과 같은 향수를 자아내는 문화적 황금기입니다. 어째서 하필 1973년으로 떨어졌는가? 그것은 그의 유년기이자, 그것이 바로 지금의 영국을 낳은 '원시적 출발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에서 현재 한국의 원시적 출발점을 1986년의 화성으로 잡았듯이.

그래서 이 드라마가 자국인(영국인)에게 던지는 질문은 종국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1973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돌아가겠니?” 《라이프 온 마스》는 그렇게 ‘시대적 정체성’에 대한 이중적이고도 흥미로운 자각을 드러내는 텍스트입니다. 이것을 한국영화 《박하사탕》에 나오는 “나 돌아갈래!”라는 저 유명한 대사와 대비한다면 영국와 한국의 ‘과거 회귀 본능’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노스텔지어를 자아내는 시대, 돌아가려면 정말 돌아가겠습니까?

김남훈
가사 번역 도움 : 김태서

* [드라마틱] 12월호 게재. '드라마로 문화읽기' 코너.

2008/01/10 11:57 2008/01/10 11:57
article 2008/01/10 11:57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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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가라시 다이스케, (서울북스)

뛰어난 환상문학의 경지에 이른 만화가를 꼽는다면 누가 나올까. 《살아 있는 목》 외의 ‘시오리 시미코’ 시리즈를 그린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자격이 충분하다. 그의 만화는 소도시 괴담을 해학과 위트로 풀어낸 웃음기 가득한 보르헤스의 세계다. 한국에도 이미 잘 알려진 《충사》의 우루시바라 유키도 빠질 수 없다. 문명으로부터 외떨어진 일본 외곽 지역을 무대로 생명의 근원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나가는지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마녀》의 이라가시 다이스케 역시 이 수준에 이른 작가다. ‘만화 매체의 성취’면에서는 저 둘을 웃도는 성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듯싶다. 《마녀》는 현대를 배경으로 곳곳에 숨어 있는 마녀를 다룬 연작이다. 첫 번째 이야기 〈스핀들〉을 보자. 무대가 되는 이스탄불은 한때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며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7세기에는 메가라왕국의 수도 메가라였다. 고대 신앙, 그리스 신,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이곳에 두 마녀가 등장한다.

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서양 소녀다. 사소한 계기로 자기 안에 있는 근원을 자각, 도시의 곳곳에 근원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성숙한 여인이자 무서운 마녀로 성장한 그녀는 원한을 풀고 싶어 한다. 다른 여성은 유목민 소녀로, 어느 날 신의 전언을 받았다. 단순히 수도로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수도로 간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채로.

만화는 독립적인 구성의 짧은 챕터로 이어지며, 파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이(‘스핀들’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물레가 실을 감아올리듯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간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구성에서 보이는 만화의 힘이다. 일본에서 만화라는 시각 매체의 한계를 넓히려고 하는 이들이 서구 만화인 그래픽노블의 방법론을 탐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도 다르지 않다. 일본 주류 만화가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가 주는 힘에 최대한 의존하며 '빠르게 읽히는' 데 주력한다면 시각 매체의 한계성에 주목하는 인디만화들은 한 컷에서 줄 수 있는 회화적인 메시지에 주목하며, 일본 만화에서 이야기의 풍부함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렇듯이).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여기에서 특별한 수준에 올랐다.

그것은 문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달력에 대한 궁구다. 〈스핀들〉 이후부터는 지명을 명시하지 않은 채 세계 곳곳의 여성이 어떻게 ‘마녀’로 ‘발생’하는지, 세계의 근원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일본의 여고생이기도 하고 오지의 원주민 여성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들도 마치 실을 뽑아내는 물레가 회전하듯 시각을 자극하고, 그것이 이야기를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눈과 오감을 끌어올린다. 단순한 ‘환상’에 그칠 만한 단조로운 이야기가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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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를 볼 때 사실성이나 이데올로기적 메시지에 주목하는 것은 옳은 잣대가 아니다. 이야기의 아이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의 주술적 친화력에 주목하는 마녀에 대한 해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보다는 이 이야기의 환상적 색채와 그것이 만화식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쾌감을 주는가에 주목하자. 특히 개발 세력에 침식당하는 원주민의 이야기를 다룬 〈쿠와루푸〉(1권)는 세계 어느 만화제에서나 상을 받아 마땅한 만화 매체의 성취를 보여준다. 〈페트라 게니탈릭스〉(2권)는 압도적인 단편이다. 여기에는 캐릭터나 플롯만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힘이 있다. 《마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보여주는 괴담문학의 수용이나 우루시바라 유키의 우화 드라마 영역 외에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한 뛰어난 작품이다.

* [판타스틱] 2008년 1월호 게재

2007/12/29 03:19 2007/12/29 03:19
article 2007/12/29 03:19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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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왕사신기>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 이건 <바람의 나라>의 표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시놉 단계에서 ‘바람의 나라’에 저작권을 협의하려 한 일이 있고, 애초에 ‘어떤 수준에서건 참고로 해서 만들어진 드라마라면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소송 원고 측의 의견도 당연히 납득이 간다. 혹은 애초에는 닮은 구석이 상당히 많았던 시나리오와 공개된 드라마는 거의 완전히 다른 점을 봐서 저작권 시비가 있은 후 시나리오에 상당한 수정이 있었던 점도 분명하다. 하여튼 완성된 드라마는 <바람의 나라>를 거의 닮아 있지 않다. 심지어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나오는 부분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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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 있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설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왕사신기>는 따지고 보면 김진이라기 보다 김혜린적이고 김혜린적이라기 보다 신일숙적인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모래시계>에서 이미 송지나 작가의 극본은 김혜린과 뚜렷한 접점을 보여준 바 있다. 비운의 역사가 있고, 아름답고 고상하지만 하층 계급과 함께 웃을 줄 아는 주인공이 있으며, 혁명가들이 있다. <모래시계>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꽤 닮은 점이 많았다. 적어도 <실미도>와 <공포의 외인구단>이 닮은 정도는 되었으리라. 남-녀 주인공 간에 딱 하룻밤만 자는 것도, 역사와 비련의 로맨스가 어우러지며 남자는 죽음에 이르는 것도 말이다. <태왕사신기>는 굳이 비교하자면 신일숙이다. <태왕사신기>의 상고시대 여전사들을 보면서, 어라... 어딘가 신일숙.. 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꼭 나뿐이었을까. 그리고 전체의 분위기는 음, <리지니>를 연상시킨다. 정통의 왕이 될만한 자가 가짜 왕을 이기고 왕이 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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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바람의 나라>와 김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진이 한국 순정만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이 두 대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플롯의 차이가 아니라 내면에 자리한 풍경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김진의 경우, “주인공이 왕이 되는 성공담”이나 “여성이 왕비가 되는 신데렐라담”은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김진은 신일숙과 차별되는 작가다. 또한 김진은 여인의 비련을 말하지 않는다. 비운과 고난으로 점철된 시대에 온갖 고초를 겪으며 순수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 남자는 죽어버리고 혼자 살아가는 그 여인 말이다. 그래서 김진은 김혜린과 다른 작가이다. 요컨대 김진은 고난을 이기고 승리(신일숙)하거나, 고난을 견디고 초극(김혜린)하지 않는다. 김진 작품의 주인공은 고난 속에서 고난 그 자체가 되어 동상처럼 굳어지거나 그러기에는 너무 순수해서 부스러진다.

지나친 비약이긴 하지만 <태왕사신기>의 상고시대 여전사를 보면서(기하, 새오), 신일숙의 만화에 등장하는 여전사를 연상한 사람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은 확연히 남성중심적인 세계를 그려왔다. 남자들은 ‘국가’을 건설하고 여인들은 그 안뜰에 앉는다. 야심을 가진 여인은 왕의 옆에 앉아 그 귀에 독의 혀를 기울이고 야심이 없는 여인은 피의 폭풍을 피해 뒤뜰 정원에 앉는다. 제국의 바깥에는 원귀들이 가득하다. 고구려 왕 유리는 부여의 눈치를 보며 태자에게 자결을 명한다. 셋째인 무휼(대무신왕)은 바로 그것, 아비가 아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며 자라났다. 그리고 왕이 된 후 그는 자신의 아들 호동에게 죽으라 명한다. 이것이 김진이 말하는 ‘국가’이며 ‘남성들의 세계’이며, ‘세계의 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별의 운명을 받아’, ‘만백성의 환호 아래’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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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심상 이미지적 세계’와 ‘한국적 가부장제’에 대한 통찰이 김진을 천재 작가로 만들었다. <바람의 나라>를 두고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역사를 다루었다고 마케팅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솔직히 틀렸다. <바람의 나라>는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는” 만화가 아니었다. 도리어, ‘가족’과 ‘가부장제’, ‘왕권’이라는 테마에 대해 깊이 숙고하여, 우리가 지나온 80년대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국가'가 실제로는 어떤 감정적/물리적 폭력 속에 일구어져 온 것인가를 '고구려'라는 한 나라를 통해 숙고한다. 그 안에는 너무 많은 피와 눈물을 보아 이제 웃는 법조차 잃어버린 남자들로 가득하다. 김진의 세계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신수들은 개인의 운명이 형상화된 존재들이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운명도 아니고, 초능력도 아니며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왕자 호동은 ‘봉황’의 신수를 가지게 된다. 봉황의 신수는 아버지 무휼의 청룡과는 서로 ‘살성’ 관계다. 그래서 그는 죽는다. 그것이 김진이 말하는 ‘고구려’ 혹은 '국가' 혹은 '어떤 가족'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김진은 ‘반 민족주의적’인가? 아니 오히려 ‘탈 민족주의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김진이 보여주는 국가와 가족에 대한 애증은, 지나치게 델리케이트하고 또한 드라마 플롯으로 잘 정리되기 어렵다. <바람의 나라> KBS 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우려스럽다. 지금까지 드라마화된 고구려 관련 사극은 모두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 나라에는 “역사를 한번이라도 자랑스럽게 음미하고 싶어하는 대중과 그것을 위한 컨텐츠를 제공하고자 하는 드라마 제작사”가 있다. 그리고 김진의 <바람의 나라>는 그들 사이에 놓이지 않는 작품이다. 그래서  과연 작가의 의도를 살리면서 드라마화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공개된 <태왕사신기>는 김진과는 전혀 무관한 작품이었다는 점이다.

* [드라마틱] 11월호 게재. '독선적 취향' 코너

2007/12/01 13:16 2007/12/01 13:16
article 2007/12/01 13:16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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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카오루의 《엠마》 그리고 《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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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은 오랜만에 고전미에 충실한 만화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배경, 차분하고 정련된 연출, 일상적인 대사 속에 그 내면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고전 로맨스물'의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만화를 손에 짚은 어떤 독자는 이렇게 외쳤다 한다. “오오, 모에와 오타쿠에 찌들어 병들어버린 일본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만화가 등장할 줄이야!” 그러나 작품 뒤에 실려 있는 작가 후기를 읽었을 때 그는 깨닫고 말았다 한다.  지금까지 읽은 것이 무려 '메이드물'이라는, '오타쿠' 물 중에서도 가장 골수적인 한 장르였다는 것을!

그러나 "전 메이드에 미친 인간(무려 여자)입니다"라고 부르치는 작가의 후기를 목격한 후에도 작품에 대한 애정을 저버릴 수 없는 독자들이 있었다(꽤 많았다). 메이드인 엠마와 신사 계급 윌리엄과의 사랑 이야기, 로맨스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플롯을 담은 이 만화를 끊을 수 없던 이 독자들은 자신이 메이드 중에서도 무려 '안경 메이드' 이야기에 열광한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두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해서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는 후문이다. 그 하나는 메이드광임을 고백하는 작가 후기를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 그 후기를 본 후에도 ‘작가가 메이드광’이라고 부르짓는 대목만 순식간에 뇌에서 교정해버리는 것이다. 또 다른 두 번째 전략, 그것은 ‘메이드물’이라는 것을 그렇게 골수적인 '오타쿠물'로 간주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달랬다는 이야기다.

"메이드 취향이 그렇게 불건전한 건 아니더라고…"
"그렇지, 그렇지. 사실 '백조의 호수'도 따지고 보면 오타쿠물 아냐?"

기억을 교정하거나 취향을 수정하면서까지 보아야만 했던 만화의 작가, 모리 카오루의 다른 작품이 출간됐다. 《엠마》 이전에 그린 단편을 묶은 작품집, 무려 《셜리》다. '엠마' 다음에 출간된 작품도 메이드물, 그것도 이름이 무려 '셜리'. 작명 센스가 왜 이러냐고 불평하고 싶어지긴 하지만 역시 《엠마》를 읽은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13세 메이드'라는 골수적인 요소를 등장시켰음에도, 메이드물이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볼 수 있을 만큼 차분하게 몰입시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가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이야기 안에서는 인물과 정경, 이야기의 전개에 집중하게 만드는 설득력 있는 연출력의 보유자가 바로 모리 카오루다.

* [판타스틱] 11월호 게재

2007/11/29 13:07 2007/11/29 13:07
article 2007/11/29 13:07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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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을 옹호하는 지역, 성서 지대

제임스 스페이더가 이번 에미(Emmy)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을 겁니다. “제임스 스페이더? 뭘 연기하는데?” 그가 열연하고 있는 TV 시리즈 <보스턴 리갈(Boston Legal)>은 미국에서는 메이저 드라마에 속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지명도는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보스턴 리갈‘은 보스턴 지역의 ’크레인 폴 앤 슈미트‘라는 법률회사를 다루는 말하자면 ’전문직 드라마‘입니다. 인물들이 변호사이다보니, 그들이 다루는 법률적인 내용이 드라마의 큰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미국이니만큼 별 황당한 내용의 소송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양이의 안락사를 둘러싼 남편과 아내의 대립”이라든가, “매춘 혐의로 구속된 성 치료사”라든가.

이런 황당무계한 의뢰를 다루는 변호사들 이야기가 드라마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서는 매 회 미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진지한 이슈를 다룹니다. 총기 사건이나 전쟁 관련 재판, 텍사스 지역의 사형제도 등. 이런 진지한 사건을 바로 제임스 스페이더가 연기하는 ‘앨런 쇼어’라는 변호사가 담당합니다. 주인공인 앨런 쇼어는 바로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그리고 앨런 쇼어의 절친한 친구인 회사 대표 데니 크레인은 자타 공인하는 공화당 지지자입니다. 이 ‘민주당적 사고방식’과 ‘공화당적 사고방식’의 대립이 이 시리즈의 주요 갈등을 이루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양당 간의 민감한 사안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에피소드 “Witches and Mass Distruction"(206)에서 앨런 쇼어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사망한 병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맡게 됩니다. 그러자 데니 크레인은 이렇게 반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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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미국인이고, 지금은 전쟁 중이야.. 민주당 놈들조차 이 일에 대해서는 알아서 입 다물고 있는 걸 모르나? 당장 고소 취소하게.”
(We are Americans. To be critical in a time of war... Even the Democrats are smart enough to keep their mouth shut on this. Drop the cas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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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걸프전 참전 용사인 동료 변호사 브래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젊은 병사의 성스러운 희생을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나! 걸프전에 자랑스럽게 참전했던 사람으로서, 맘에 안 들어.”
(what you're doing is an arrogant dismissal of that young soldier ultimate sacrifice. and as somebody who served in the Gulfwar, proudly - I don't like it.)



물론 브래드 역시 전형적인 공화당 지지자이죠. 그렇다면 민주당과 공화당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아래 지도를 봅시다. 미국에서는 흔히, 공화당 지역을 ‘빨간 주(Red States)'라고 합니다. ‘파란 주(Blue States)'는 물론 민주당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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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2004년 공화당 후보인 부시에게 투표한 주를 붉게, 민주당의 앨 고어에게 투표한 주를 파랗게 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향차이가 확실히 드러나죠. 서쪽의 시애틀, 워싱턴, 로스엔젤리스나 동쪽의 뉴욕, 보스턴, 북부의 디트로이트까지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농가들이 몰려 있는 서부나 중부의 경우는 붉은 색 일색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성서 지대(Bible Belt : 성서 근본주의자들의 지역)가 어디인지를 보면, 자 아래, 지도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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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부에는 사막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성서 지대와 공화당 지지자들의 지역은 거의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스턴 리갈에서는 종종 “이번 판사는 성서지대 타입이야”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은 상당히 보수적인 타입의 판사라는 뜻이고 공화당 쪽 가치에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스테레오타입이라면 당연히 신이 수호하는 미국의 권위를 옹호하고, 가부장적이며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고, 총기를 옹호하며, 낙태 문제는 절대 반대, 종교는 기독교. 말하자면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보스턴 리갈에서는 데니 크레인이 이 공화당을 (조금 희화적으로) 상징하고 있죠. 앨런 쇼어가 상징하는 민주당은 말하자면 여기에서 좀 더 온건한 쪽이인데, 아무래도 미국의 권력에 대해 좀 더 반성적이고, 낙태문제보다는 여성의 권리에 조금 더 치우칩니다. 물론 이건 스테레오타입일 뿐이지만 민주당이 여러 사안에 대해서 조금 더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식 진보 역시 어디까지나 ‘신이 수호하는 미국’의 전제 하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서 ‘신’이란 기독교/개신교의 신입니다. <보스턴 리갈>에서는 앨런 쇼어가 ‘신이 수호하는 미국’이라는 가치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치를 위배하는 변호를 하면 당연히, 바로 배심원들의 반감을 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정신구조로 쌓아 올려진 나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회와 다양성이 열려 있는 나라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이니만큼 국가의 성스러움을 더욱 강조하며, 모든 가치는 그 위에 쌓아 올려진다는 것을요.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말입니다.  
 
* [드라마틱] 11월호 게재. '드라마로 문화읽기' 코너

2007/10/29 12:54 2007/10/29 12:54
article 2007/10/29 12:54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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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CSI》의 ‘Fallen Idols’ 에피소드(717), 《히어로즈》의 ‘Don't Look Back'(102), 《뱀파이어 슬레이어 버피》의 ’Witch'(103). 이 세 에피소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런 식으로 물으면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느냐고요? 네 그냥 말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위 세 에피소드의 공통점은 바로 ‘치어리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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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I》의 에피소드에서는 농구선수와 사귀는 치어리더가 실종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히어로즈》의 에피소드는 회복 능력을 지닌 치어리더 클레어가 화제 속에서 인명을 구했는데, 다른 치어리더 친구가 자신이 했다고 나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뱀파이어 슬레이어 버피》의 에피소드 ‘Witch’는 여고생 뱀파이어 헌터인 버피가 치어리더 선발 오디션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재미난 전개가 담겨 있습니다.

(1906년, 코넬(cronell) 대학의 치어리더가 그려진 우편엽서, 좌측)

이 세 시리즈 뿐 아니라 미국의 하이틴물을 보면 치어리더가 꽤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처럼 치어리더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을 볼 수 있는데요, 한쪽에서는 미식축구 및 농구 등 학생 스포츠와 연관되는 건강한 활력과 애교심을 담은 여학생의 활동이라는 인식이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금발에 키 크고 몸매 좋고 ‘머리가 빈’ 여고생들의 체육활동으로 치부합니다. 버피의 영국인 후견인 자일즈는 치어리딩 활동을 ‘종교숭배(cult)', '생각 없는 짓(madness)'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이걸 편견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치어리더 여고생들을 보면 미국인들 자신들이 이 문화를 꼭 좋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위의 자일즈의 말 역시 시나리오 작가가 미국인인 만큼 미국인의 자기조롱에 가깝죠. 《CSI》는 농구와 치어리딩이라는 양성적인 학생 활동 아래 흐르는 어두운 조류, 살인사건을 묘사하고 《히어로즈》는 클레어가 열심히 매달리는 치어리더 모임이 ‘겉만 화려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버피》는 역시 금발에 몸매 좋은 아가씨 버피(사라 미쉘 갤러)의 치어리딩 참여 에피소드를 통해서 치어리딩에 관계된 사회적 이미지 자체를 비틀고 풍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양쪽 다 진실일 겁니다. 속 깊은 애들이 경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겠고, 반면 치어리더에 참여한 애들이 그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여자애들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죠. 뭐라 해도 미드에서 치어리더’는 미국 고교에서 미식축구 선수 만큼이나 ‘잘 나가는 여자애’들의 모임으로 묘사되고, 그래서인지 클레어나 버피처럼 치어리딩에 참가하려고 기를 쓰고, 후보자들이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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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어리딩(Cheerleading)은 미국 본토에서 생겨난 몇 안 되는 문화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 말에만 해도 치어리딩은 학교 대항 스포츠 경기에서 관중 응원을 ‘리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910년까지만 해도 ’치어리더‘는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말 그대로 ‘응원단장’ 정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치어리딩’과는 좀 거리가 있지요. 좌측의 우편엽서 그림을 보면 이 당시의 ‘치어리딩’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냥 ‘응원단’이지요.

그러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여성이 본격적인 치어리딩을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부터로서, 그 이유는 여성들의 대학 체육 활동에 선택의 폭이 좁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치어리딩은 당시 여성들에게 허용된 몇 안 되는 체육활동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체조동작이나 텀블링 같은 고난도 율동이 치어리딩에 포함되며 전문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성이 치어리딩 활동을 시작한 것은 마땅한 체육활동이 없고, 학교에서 건전하게 인정해주는 몇 안 되는 체육활동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운동선수를 하면 되겠지만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프로를 지향하게 되고, 사회생활을 누리긴 힘드니까요. 어쩌면 저 아이들도 그런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몸도 건강해지고, 사회 활동도 활발해지고, 물론 멋진 남친을 사귈 기회도 늘어나고 말입니다.

* [드라마틱] 10월호 게재. '드라마로 문화읽기' 코너

2007/10/29 12:37 2007/10/29 12:37
article 2007/10/29 12:37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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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 순정 판타지의 연표를 장식하는 권교정의 신작 <청년 데트의 모험>

한국 순정만화사에서 권교정의 입지는 특이하다. 1990년대 말에 데뷔한 일련의 작가들 사이에서도 독자적인 ‘독자층’을 보유한 몇 안 되는 작가이며, 무엇보다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데뷔했을 때는 피터팬이나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재해석한 일련의 우화풍의 단편들로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권교정의 트레이드마크인데, 그가 손을 대면 학원물이든 SF이든 판타지든,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어색해도 괜찮아》는 학원물이라는 장르를 현실의 일상성 속에서 ‘실제 있을 만한 그 무엇’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우주 스테이션’에서의 일상을 시트콤의 터치로 그려내지만 SF 특유의 스케일과 철학, 과학에 대한 의식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장르 판타지인 《헬무트》도 마찬가지다.

권교정의 장점은 그렇게 장르를 ‘보다 리얼한’ 세계로 재편성하면서도 장르 본래의 재미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권교정은 ‘장르에 순응(?)’하며 장르의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의 디테일을 바꾸어놓는다. ‘작은 것을 고침으로서 큰 것을 다르게’ 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작품의 등장인물들의 그 세계의 ‘큰 이야기’보다는 작은 구성요소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숙고하며 작품 속 세계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면모를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충실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권교정의 작풍은 독자를 ‘흥분’시키기 이전에 ‘현실적인 공감’을 이루어낸다.

인터넷 만화 웹진 《코믹뱅》에서 연재되어 묶어낸 이 판타지를 볼 때의 느낌은, 드디어 작가가 자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긴 서사’를 그려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순정만화의 전성기인 1980대는 그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이 넘쳐났던 시기였다. 이후 90년대의 순정만화는 일상과 이미지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는데 일련의 높은 성취를 이루어낸 작품군이 있었지만 ‘긴 호흡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를 구성해내는 능력은 아무래도 전 시대에 비해 떨어졌다. 이 시기 ‘대하풍 판타지 서사’로 완결된 작품은 신일숙의 《리지니》나 황미나의 《레드문》, 강경옥의 《노말시티》 등 한국 순정의 초기를 장식한 작가들의 것이었지 소위 ’뉴웨이브 작가‘들의 작품은 아니었다. 90년대에 새로 등장한 작가들의 일상과 이미지성의 걸작/수작들은 주로 3, 4권의 소품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강점이자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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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청년 데트의 모험》은 90년대 작가로서의 권교정이 내딛은 하나의 발걸음이다. 정통 순정 판타지의 긴 호흡을 클리어하면서도 작가 자신의 일상적/현실적인 작풍을 하나로 용해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데트의 모험》은 이전에 그린 대하 판타지 《헬무트》(더이상 출간되지 않고 있는)에 비해서도 구성력 면에서 보다 ‘독자를 흥분시키는’ 뚜렷한 굴곡과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는 황미나, 김혜린 등 전세대 작가들의 장기인 ‘감정적 굴곡과 선 굵은 뚝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긴 호흡의 서사를 마련하는 방법을 마련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 ‘페라모어’ 세계의 전체 역사를 이미 구성해놓고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기교를 훌륭하게 구사하고 있다. ‘선 굵은 서사와 감정적 굴곡’ 대신, 디테일이 풍부한 인물과 이야기 구성, 지적으로 대담한 전개가 그 자리를 성공적으로 메꾸어낸다.

《청년 데트의 모험》에 앞서 주인공인 데트의 노인 시절 이야기를 그린 1권짜리 《왕과 처녀》가 먼저 출간되었다. 또한 본작의 1, 2권은 ‘데트’ 등장 이전의 인트로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어둠용 노이긴’ 이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과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논의하는 세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인트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어서 따로 출판되었다면 세 작품이 하나의 연대기를 이루게 된다. 즉 ‘메인 스토리’의 앞과 뒤를 장식하는 소품 격 장편을 미리 읽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결국 독자는 긴 이야기의 전후를 살펴보고 이야기의 결말을 미리 알고 세계에 입문한다. “데트가 어둠용을 물리친다!“ 그것은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보다 ‘청년 데트’가 어떻게 시대를 구하는 용사로 성장하는지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작품을 읽은 주변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계속 그 자리에서 ‘괜찮은’ 작품을 그리고 있는 줄은 알았는데 ‘발전하고’ 있는 줄은 깨닫지 못했다”고. 그것은 만화를 위시해서 모든 매체의 작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찬사다. 계속 그 자리에서 작품을 만들고, 조금씩이라도 발전하는 것. 당신은 그런 작가와 작품을 몇이나 알고 있는가. 《청년 데트의 모험》의 출간으로 한국 순정의 ‘대하적’ 서사 작품 연표에 추가할 수 있는 한 작품이 추가되었다. 만화판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고(?)인 ‘잡지 폐간’에 의한 연재 중단 등등이 없다면 본작은 순조롭게 완결되어 한국 순정 및 판타지의 한 역사를 장식할 것이다.

* [판타스틱] 9월호 게재.  

2007/10/09 12:26 2007/10/09 12:26
article 2007/10/09 12:26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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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미의 [Now]

김창완이 말하길, 한국은 허무주의자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라고 했다. 그 말을 조금 바꾸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은 탐미주의자에게 허락된 영토가 너무 협소한 사회라고. 사실 허무주의/탐미주의는 오히려 일제시대에는 적절한 지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이후로, 80년대를 거치면서 아예 뿌리채 뽑혀나갔다. 첫째로 독재정권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고(‘퇴폐적’이라는 명목) 둘째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권 진영에 의해 부정되었다(‘부르주아적’이라는 명목). 독재자와 그 반대자에 의해 모두 시민권이 박탈된 것이다. 미8군 무대에 올라 록을 연주하던 한국 뮤지션들이 처한 운명이 바로 그랬다.

한국 대중 문화에서 독재 정권이 가한 타격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바로 미8군 진영에서 연주하던 록/소울 뮤지션들이 메이저로 진출하지 못하고 대마초 파동으로 줄줄이 고초를 겪고 좌절했던 것이다. 그 이후 한국 사회가 진짜 ‘음악적’으로 연주 잘 하는 ‘록과 소울’ 혹은 ‘사이키델릭 뮤직’의 의 맛을 보지 못한 채로 지금껏 달려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음악적 탐미주의자’의 손길이 팝 차트를 오르내리는 역사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지금 한국사회가 ‘록’이라는 명칭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음악이 윤도현이나 자우림 식의 ‘건강한 보컬’과 ‘펑크식 반주’ 뿐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 역사가 기록하는 ‘미싱 링크’의 한 증상일 뿐이다.

그러나 60년대 말, 신중현이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손댄 ‘펄 시스터즈’의 앨범이 대박을 터트린 것은 일종의 반전이다. 신중현이 작곡하여 여성 가수들에게 제공한 ‘커피 한 잔’이나 ‘꽃잎’이 그 시절에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의 차이는 어떨까? 이 음악들은 시대적 정욕을 해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기능적인 음악으로서 최상치의 예술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노래들이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를 인지해주는 사람이 당시에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신중현은 한국 축구로 치면 차범근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차범근이 그냥 공 잘 차는 축구선수였던 것처럼 신중현은 그냥 잘 나가는 유행가 작곡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둘 모두 한국 대중이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들이었다. 다만 차범근은 독일에서라도 알아주었지만, 신중현을 기다리는 것은 중정원 취조실이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탄압받았다고 해서 그 반동으로 너무 찬양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신중현에 대한 찬양은 이제 꽤 진부하니까 말이다. ‘펄 시스터즈’는 그냥 지금의 걸 댄스 밴드와 크게 다를 것 없고 ‘커피 한 잔’은 그냥 센스 있게 만들어진 유행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로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 ‘미인’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미인’이 한국 록 역사 최고의 명곡이라는데, 흠. 아리랑 선율을 뒤집어서 록 리프로 연주한 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냥 기발한 아이디어일 뿐이지.

그러나 ‘바람’이나 ‘꽃잎’ 같은 ‘탐미적인’ 곡에 이르면… 나는 신중현이 한국 대중음악에 제공한 최고의 순간이 바로 이런 곡들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곡에서 신중현의 리듬 기타는 최고의 센스를 발휘하고 특이한 화성작법(믹소리디안 선법!)은 최면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여성 보컬은 기묘한 비음으로 모음을 길게 늘이며 비상하고, 더불어 곳곳에 끼어드는 현악의 편성은 천재적이라는 말이 부족하다. 신중현의 탐미적인 재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앨범은 바로 김정미의 [Now] 앨범이다. 특히 1번 ‘햇님’, 2번 ‘바람’, 3번 ‘봄’으로 이어지는 곡의 흐름은 가요를 빙자한 사이키델릭 교향곡의 1, 2, 3장이다. 개인적인 취향이라고는 해도 나는 이만큼 아름답게 빛나는 음악적인 순간을 한국과 해외를 통틀어 다른 앨범에서 결코 접한 적이 없다.

* [드라마틱] 9월호 게재. '독선적 취향' 코너
2007/10/08 20:13 2007/10/08 20:13
article 2007/10/08 20:13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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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시리즈 <닥터 하우스(Dr. House)>의 주인공 하우스는 지독하게 개성적이고 룰을 무시하는 타입의 의사입니다. ‘흥미로운 질병을 가진 환자’만을 상대하고 싶어하고 일반적인 진료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진료실에 앉아 근무시간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군요. 환자와 함께 야구중계를 보면서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동료의사이자 친구인 윌슨이 하우스에게 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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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 캐머론(진단의학과를 그만둔 하우스의 부하직원)이 돌아오기로 했어요?
환자 : 캐머론이 누구예요?
하우스 :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예요.
(잠시 침묵)
윌슨 : 연봉 올려줬어요? 아니면 추가혜택으로 꼬셨어요?
하우스 : 이거 티보(Tivo)에 연결 안 되어 있거든? 못 돌려보니까 조용히 해!

여기에서 하우스가 민감한 질문을 피해가기 위해서 언급한 ‘Tivo'는 대체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한 설명은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DVR)‘의 히트 제품명이라는 것입니다. 특정 승합차를 통틀어 ’봉고‘라고 부르듯이 1999년에 Tivo 제품이 출시된 이후 TV에 연결하는 DVR은 모두 Tivo라고 불리우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Tivo는 이미 동사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tivo me'라고 하면 ‘녹화 좀 해줘’라는 뜻입니다. 이쯤 되면 이미 제품이 아니라 문화라고 해야겠죠.

미국 TV 시리즈를 보면 종종 미식축구나 농구 경기를 녹화해두었다가 나중에 (경기 결과를 듣지 않고) 실시간 중계를 보듯 즐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대표적인 Tivo의 기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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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Tivo는 TV 프로그램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하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를테면 광고는 빼고 본 프로그램만 녹화할 수 있다거나, 스포츠 경기처럼 중간 광고가 끼어 있는 경우 재생 중 버튼 한 번으로 광고 한 편을 건너뛸 수 있습니다. 만일 해당 TV 프로그램의 방영 시간이 변하더라도 Tivo는 자동 대응해서 녹화합니다. 그 외에 또한 아마존 닷컴을 통해 영화를 다운받거나 할 수도 있고, 녹화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동안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타임 워프(Time Warp) 기능이라고 합니다. 미국처럼 케이블과 공중파를 포함 수많은 채널이 있는 국가에서는 필수품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PC로 TV 프로그램을 다운받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게 보입니다. 그런데 Tivo가 동영상을 다운로드하는 것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PC의 P2P 다운로드/공유가 단순히 ‘지난 방송을 다운받아’ 보는 것이라면 Tivo의 녹화는 ‘수많은 TV 프로그램의 방영 시간을 자신에 맞게 조정’하는 것입니다. 즉 ‘지난 방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케쥴로 방송 시간을 조정’한다고 여기는 문화를 낳은 것입니다. 이미 끝난 스포츠 중계 방송을 ‘결과를 듣지 않고’ 손에 땀을 쥐며 관람하는 풍경은 바로 이런 문화에서 나옵니다.

이런 DVR 문화는 한국에 적용되기는 조금 무리인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케이블을 신청하면 작은 셋톱박스를 구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셋톱박스의 가격 안에 몇 가지 케이블 수신 비용이 포함되어 있고 또 이 셋톱박스를 통해 프로그램의 녹화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애당초 수많은 케이블 중에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대에 볼 수 있는 문화가 성립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공중파의 절대적인 지배가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PC를 통한 자료공유가 당연한 듯 무료로(!) 활성화되어 있지요. 국가마다 문화 차이가 있으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첫째, Tivo 쪽이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고, 둘째, Tivo 쪽이 더 로맨스가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OO방송 녹화해두었어. 같이 볼래?”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파일 보내줄까?” 보다야 아무래도 낫지 않나요.

* [드라마틱] 9월호 게재, '드라마로 문화읽기' 코너

2007/09/25 03:27 2007/09/25 03:27
article 2007/09/25 03:27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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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과대학생들, 쿨한 음악을 논하다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는 여성친화적인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의과대학에 들어간 매러디스가 위대한 의사였던 어머니의 오라와 싸워나가는 과정이고 직속 직장 상사와 로맨스를 벌이는 내용이며, 한 여성이 '전문직 여성'으로 성공적으로 거듭나며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레이 아나토미는 쉴 새 없이 음악을 선곡하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최신곡들이 흘러나오고, 그것이 장면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이 드라마가 여성친화적이라는 것은 BGM으로도 많이 드러납니다. 얼터너티브나 메탈은 거의 들어서지 않고 있어요. 이러한 성향은 그레이가 룸메이트를 구하기 위해 동료 인턴에게 던지는 질문에서도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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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 : 제일 좋아하는 80년대 그룹은 누구예요?
(What's your favorite 80s group?)
인턴 A : 퀸, 트위스터드 시스터
(Queen, Twisted Sister)
메러디스 : 땡.
(No.)
인턴 A : 이봐요, 그런 질문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It’s not like there’s a right or wrong answer to that question.)
메러디스 : (일어나서 가버리며) 고고스, 듀란듀란, 유라드믹스가 있잖아요...
(Oh yeah, 'the GoGos', 'Duran Duran', 'The Eurthymics'...)

요컨데 이런 밴드가 바로 메러디스의 취향이라는 것입니다. 듀란듀란을 제외하면 한국사람에게는 쉽게 감이 오지 않는 밴드들입니다. '고고스(the GoGos)'는 81년에 데뷔작 '미녀와 비트(Beauty and the Beat)'를 발매해서 팝 부문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한 5인조 걸 록 밴드입니다. You Got the beat라는 노래가 최고 히트곡입니다. 고고스는 깜찍한 말괄량이 및 즐거운 불량소녀라는 컨셉을 가진 밴드로, 말하자면 '여자들 사이에 더 인기가 좋은 걸 밴드'였습니다. '유라드믹스(the Eurathymix)'는 더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입니다. 남-녀 듀오 밴드로서, 'Sweet Dreams'가 최고 히트곡입니다. 80년대 초반에 결성되었습니다. 그렇게보면 세 밴드 다 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 성향 밴드입니다. 파티에서 틀어놓으면 즉각적으로 즐겁게 되는 그런 음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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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는 2002년에 의대생이니까, 청소년기는 80년대와 함께 보냈겠지요. 그리고 80년대는, 마이클 잭슨이 상징하듯이, '즐겁고 신나는, 그리고 단순한 메세지'의 음악으로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90년대에 거센 노이즈와 껄렁한 기타리프로 가득찬 얼터너티브 록이 등장하며 이 시대는 종언을 구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즐겁고, 신나고, 단순하게 즐기는' 음악은 이제 끝났나 싶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시대가 가버린 거죠. 하지만 2000년대가 되자 다시 뉴웨이브 뮤직의 부활하는 추세입니다. 최근 미국 TV쇼에서는 얼터너티브 VS 뉴웨이브라는 토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뉴웨이브의 승!'이라는 결론이 났는데, 그 이유는? "얼터너티브는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 끝났잖아요"라나. 으흠.

어떤 의미에서 2000년대가 이는 남성 취향에 비해 여성 취향의 우세인 시대임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는 80년대의 음악이 다시 '쿨한 것'으로 평가되는 분위기이고, 메러디스도 이 점에 있어서 완전하게 같은 생각인 모양입니다. 사실 위의 문답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 치면, "좋아하는 90년대 댄스그룹을 대봐", "음,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아니야, 룰라랑 영턱스 클럽이 빠졌잖아!"라는 정도의 문답일 겁니다. 이런 대화가 캐릭터를 매우 잘 설명해줍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캐릭터를 설명하는 장치들이 잘 활용되질 않는 것이 아닐까요.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봉달희의 음악 취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공부하고 의과대학 다니느라고 음악 들을 시간이 있었겠느냐고요?

* [드라마틱] 게제, 드라마로 문화읽기, 8월호

2007/09/08 14:51 2007/09/08 14:51
article 2007/09/08 14:51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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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전국민의 지지를 얻으며 달리고 있는 《닥터 후》. 그 세 번째 시즌에 닥터의 손을 잡고 달리는 여주인공은 바로 흑인인 마사 존스입니다. 나름대로 파격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 드라마의 경우 《히어로즈》에서 흑-백으로 이루어진 부부(니키 샌더스와 D.L)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명백한 ‘주인공’, 그것도 가장 영국적인 드라마인 《닥터 후》의 히로인이 흑인이라는 것은 용기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닥터 후》의 세 번째 시즌 2회 〈the Shakespeare Code〉에서는 그렇잖아도 인종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옵니다. 닥터를 따르면서도 반신반의하던 마사 존스는 정말로 자신이 시간여행을 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시대, 엘리자베스 시대의 런던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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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존스가 묻습니다.

마사 존스 : 나 이대로 괜찮겠어요? 노예로 끌려가거나 하진 않죠?
닥터 : 왜요?
마사 존스 : 당신은 눈치 못 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백인은 아니잖아요?
닥터 : 난 심지어 인간도 아닌 걸. 그냥 자기 집 마당처럼 걸어 다녀요. 그럼 돼요.

대화를 보면 아무래도 지금처럼 흑인에 익숙한 사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드라마 화면을 보면 흑인이 눈에 띄곤 하지만 현재의 런던에 비하면 1599년의 런던은 압도적으로 백인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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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러 몰려드는 1599년의 군중)

우리는 흔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백인으로 구성된 사회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현재 영국 인구의 10%가 유색인종입니다. 이것도 전체 국토에 대한 것이고 실제로 런던에 한정하면 더 비율이 올라가서 상당히 다인종적인 구성을 체감할 수 있게 됩니다. 지방보다 아프리카계나 중동계 등 거주민의 비율이 높은 편이고 거기에 유학생과 여행객이 넘치니까요. 길거리에서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를 듣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입니다.

유학생과 여행객을 제외하고도 런던에 이렇게 다양한 인종이 늘어난 것은 1950년대, 전쟁 이후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이민자 정책을 장려한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수십만명의 이민자들이 서인도제도, 파키스탄, 인도 북쪽 지방과 방글라데시에서 몰려 왔습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더욱 다양한 인종들이 몰려들어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종차별 문제는 영국의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로서, 흑인이 많은 지역의 범죄와 관련된 공익광고 간판에는 흑인이 모델로 쓰이지 않는 등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민감함이 있다고 하네요. 영국 드라마에서 흑인 주인공이 등장한다거나 하는 것도 그러한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가 마사 존스를 만났을 때의 대사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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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 이 흑인 여성은 누구요? 에티오피아 여자? 아프리카의 여왕?
마사 존스 : (당황하며) 이런 말을 듣게 될지는 몰랐네.
닥터 : 정치적 공정성이 맛이 가버린 거지.

‘정치적 공정성’ 운운하는 닥터의 대사는 시간여행자라는 신분을 이용한 닥터 특유의 농담일 터인데요, 이 시대의 영국과 현재의 영국을 나누어주는 기준은 바로 국영 방송 BBC의 ‘정치적 공정성’인 모양입니다.

* [드라마틱] 게재. 드라마로 문화읽기, 2007.6.18~7.1
2007/07/15 04:32 2007/07/15 04:32
article 2007/07/15 04:32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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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성과 고 퀄리티의 Process

넬(Nell)의 정규 3집 [Healing Process]는 첫 대목부터 역시 '돈을 충분히 쏟아부은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런 사운드에 대해서 인디사운드 마니아가 느낄 수 있는 반감은 훌륭한 곡의 작법과 편곡과 맞딱뜨리는 순간 맥주거품처럼 사그라져버린다.

서태지 컴퍼니 아래에서 발매되었던 전작에 이어 소속사를 옮겨 발표된 이번 앨범 역시 훌륭한 사운드 프로듀싱과 작/편곡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로 보면 넬의 앨범은 그 안에 투여된 노력과 성과 면에서 델리스파이스나 다른 여러 모던록 밴드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넘칠 정도의 공을 들였고 재능이 있으며, 주변 여건도 받쳐주고, 그만한 퀄리티를 내고 있다. 주류를 무대로 활동하는 밴드로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을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앨범은 '너무 전형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이 부분에서 앨범을 좋아할지 말지에 대한 호오가 갈릴 듯 하다. 전형적으로 잘 만들어졌다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미덕일 수 있다. 그런데 앨범을 들으면서 '콜드 플레이'나 '트레비스' 등이 지나치게 생각난다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장점을 말하자면 영국 모던록의 어떤 앨범에도 뒤지지 않게 잘 만들어졌는 부분이 될 것이다. 단점을 말하자면 역시 영국 모던록의 어떤 앨범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주류적으로 보면 피터팬 컴플렉스나 넬은 일반 대중이 듣기에는 '여전히 낯선 사운드'이며 인디음악을 많이 듣는 이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운드'가 된다. 넬은 이 간극에 서 있다. 당신이 어느 부분에 서 있느냐에 따라, 이 앨범은 '신선한 가요'로 들릴 것이며, 혹은 '진부한 사운드'로 들릴 수도 있다. 전작에서 보인 보컬의 '경극창법'도 어느 정도 무난하게 다듬어졌으므로 더욱.

분명한 것은 앨범의 완성도는 어느 편에 서 있는 관객이든 차분하게 설득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17곡에 이르는 곡들이 하나같이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밴드 멤버가 특정한 멜로디를 만들어올 경우, 그것을 하나의 곡으로 완성하는 작업에 이제 완연한 노하우가 쌓였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오케스트라를 동원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 밴드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2CD로 만들어진 [Healing Process]는 근 10년 가까이 활동한 넬의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넬은 현재 주류에서 활동하는 밴드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사실은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모른다. 이 앨범은 영국 모던록의 스타일과 한국 가요의 멜로디를 가장 잘 결합해낸 결과물 중 하나다. 그것이 이 밴드가 본래적으로 추구한 미학이라면, 넬은 분명 점점 강력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쯤되면 다음 앨범에서는 [Kid A] 같은 것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s 개인적으로는 넬의 이번 앨범을 3집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디시절에 낸 앨범은 그럼 다 그냥 습작이란 말인가. 밴드도 동의를 한 것이겠지만... * [Voila] 게재
2006/11/02 12:01 2006/11/02 12:01
article 2006/11/02 12:01 by 깜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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