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패티쉬'를 빌미로 한 몇 가지 생각 정리
1. 왜 대중예술계와 공생하는 일군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진정하다/진정하지 않다"라는 것은 왜 항상 소위 "작가주의"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소위 "예술가 나르시즘"과 결합되어 있는가. '진정하다'라는 평가는 "숭배"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렇게 높은 상찬과 연관이 되어야 하는가.
2. "진정성"이라는 것이 예술을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진정성이 있지만 형편없다'라는 평가는 왜 실제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진정성"은 예술 그 자체인가?
3.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성을 가진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이 그대로 예술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동을 주었다"고 해서 "예술적이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만약 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은 예술이다.
4. 한국의 인디음악씬에서 "진정하다"는 말은 인디씬의 열악함에 대한 보상심리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오직 그것만으로만 주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서의 대중음악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음원소스의 퀄리티와 작곡센스, 편곡 능력에서 이미 인디씬은 뒤쳐진지 오래이다.
5.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진정성"에 대한 강박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선한 흐름"이라는 부각이 대세였는데, 아무도 "크라잉넛"을, "언니네 이발관"을 "진정성이 있다"는 이유로 칭찬하거나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팔릴 수 있음"이 인정된 "신선함"은 주류씬에서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획"하는 시기이다. 때문에 인디음악씬이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진정성"이 된 것일까?
6. 진정성 패티쉬 - 현재 한 켠에서 고고하게 남아 잇는 흐름은 일련의 "진정성 패티쉬"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편견들이 있는데, (1) 진정한 음악이라면 정제되고 정련된 음의 세계를 구사할 것이다. (2) 포크송 혹은 펑크, 블루스, 힙합 등 고통과 고뇌, 혹은 분노를 중요시 하는 음악일 것이다. (3) 존재감 있는 보컬이 나온다. (4)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5) 그는 어려운 현실에서 치열하게 음악한다.
7. 댄스음악이나 실험음악은 진정성이 없는 음악이 된다. 편협한 예술관.
8. 이러한 "진정성 패티쉬"는 80년대 "대학생 노동문예운동"의 여파로 보인다. 계급이나 노동, 혁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불끈했던 "맑시즘 패티쉬"의 변종이다. 요약해서, 부르주아의 문예와 프롤레타리아의 문예를 구분했던 민중문예운동관의 변형태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는 "치열하게"라는 용어이다) "문화의 건강함"에 대한 일종의 윤리, 도덕적인 가치관이 개입한 결과물이다. 예술관을 대체한 정치-윤리관.
9. 음악 텍스트 자체를 즐기기 보다 '음악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자기 머리 속의 명제를 더 즐기는 욕망으로 인해 이러한 예술관은 존속한다. 음악 텍스트 자체보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신화적 서사를 더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 그 뮤지션이 어떻게 절망 속에서 일어서서 음악을 만드는데 매진했는가를 연도별로 외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음악을 추천할 때 뮤지션의 연대기를 반드시 함께 소개한다!
10. 이런 의미에서 예술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유하는 것은 생산자의 나르시즘을 항성으로 하여 그 주의를 운항하는 행성이 서로 공유하는 그것이다. 부끄러운 스텝을 밟으며 빙빙돌게 만드는 나르시즘 간의 인력.
11. 진정성에 대한 평가가 영웅주의를 곁눈질한 듯한 작가주의와 연관된다는 것은 불행, 그것이 작가적 나르시즘과 직결하는 것은 더 커다란 불행이다. 그것이 실제로는 대중스타를 꾸며주는 레이스 꽃무늬가 되어버린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진정성"이거나 "진정성의 클리셰"이거나 "진정성 패티쉬"이거나 "진정성 패티쉬의 클리셰"이거나, 혹은 "작가주의적 나르시즘"이다.
12. 자기 의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진정성 패티쉬"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있는 음악인 - 자우림. 서태지. '그것'으로 대접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클리셰'를 반복, 그 결과로 '그것'으로서 인정받고 있으므로. (패닉 첨가) - 또, 그들(클리셰)에 대한 클리셰, 문희준.
13. 예술가는 자기 삶으로 자신의 예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예술관이다. 예술보다 그 예술가의 물질조건이 더 진정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14. 뮤지션의 삶이 힘겨워서 그의 음악은 더욱 가치를 지닌다? - 새빨간 거짓말. 마찬가지로 어렵게 만든 예술은 멋진 예술이라는, 공모된 환상.
15. 사실 이런 사람의 취향은 언제나 포크송으로 회귀한다. 왜냐면 지식인이 즐길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란 결국엔 포크송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펑크를 포크송처럼 평론하고, 힙합을 포크송처럼 평론하고 팝송을 포크송처럼 평론한다.
16. "작가주의적이지 않은" 제작/기획된 작품은 필연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그러니까, [카사블랑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작가"보다 "프로듀싱"이 더 중요한 영화는 형편없는 작품들인가?
17. 질문 : 근본적으로 '깊이 있게 즐기는 것'과 '가볍게 즐기는 것' 사이에 과연 우열관계가 있는가? - 답 : 나는 가볍게 즐기는 것을 상당한 경지로 몰고 간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깊이 있게 즐기는 것'을 매우 천박하게 운용하는 사람도 알고 있다.
18. 그러므로 어떤 텍스트의 안에 내재된 힘을 마술적으로 과대평가 하는 것은 텍스트와 교감하는 인간을 과소평가 하는 결과이다. 항상 '나는 저것을 할 수 없다'라는 것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학대이며 동시에 숭배할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째서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우상을 받아들이고, 없으면 만들려고까지 하는가?
19. 우상이 없는 예술 - 영웅이 없는 예술 -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술 - 이렇란 형태는 그저 무정부주의인가? 뭐라고 이름붙여야 할까? 나는 정말로 이것을 원한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나르시즘과는 관계없이. 현재는 이러한 방면으로 진화해가고 있지만, 나는 "높은 수준"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다. 이를테면 어슐러 르 귄 정도로는 SF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한 둘은 있었으면 좋겠다.
20. "작가"라든가 "진정성을 가진 노래"라거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녀석들은 혐오스럽다. 대중을 호도한다. 차라리 "스타"와 그 "빠순이"들이 훨신 낫다. 그들은 속이지 않으며 속이려고 해도 그럴 실력이 없다.
21. "듀란듀란Duran Duran" 같은 밴드는 당시의 비평가들에게 "얼굴 밴드"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듀란듀란을 듣고 자란 세대가 비평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가 오자, 듀란듀란은 '외모 뿐 아니라 음악적 센스도 뛰어난' 밴드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듀란듀란에게 영향받은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급상승, 욕망과 권력. - 부르디외.
22. 진정성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우리는 상호교감이란 끊임없는 가변성 속에 놓여 있고, 그것이 가변성이야 말로 문화의 풍요함을 보증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그의 예술취향은 그의 성적 취향과 그 사람의 성장배경, 자라면서의 트라우마, 현재의 사회적 환경과 스트레스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 삶의 진정성을 언급할 때 그의 성적 취향과 음식 취향, 그리고 주거환경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오직 "서사"의 플롯에 해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열거한다. 이 용어는 삶을 대변하는 듯 하면서 삶을 배제하는 폭군이다.
24. 어떤 이들이 히피 밴드를 따라다니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사랑과 평화의 이상향을 추구한다면 나는 그들의 "히피음악의 진정성"에 대한 주장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진정성"이라는 말 따위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자연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에 대해서 진정성 여부를 묻지는 않을 테니까.
진정성이라는 말은 자기 삶의 그럴듯한 대용물을 찾아헤매는 이들의 기원으로, 서구적인 자학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고행과 구원의 모델을 내재한다. (BGM - 제프 버클리 : 할렐루야Hallelujah)
25. 예술을 구원하는 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의 삶이지, 그것을 만든 이의 삶이 아니다.
26. 현재 한국사회의 "대중예술관"은 지나치게 30대 중반후반 남성들의 이데올로기와 감성에 맞추어져 있다. 그 외의 세대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대중문화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질 않는다. 지적 욕심으로 가득찬 10대가 30대 중반의 눈과 감성으로 앨범을 평가하는 것을 읽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10대 예술생산자가 30대 중반후반 남성 비평가의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파괴적인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이 "관觀"을 가지고자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 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전의 세대는 대중문화에 관심이 없고 그 이후의 세대는 조직화된 세계관이 부재하므로.
이 사회에서 우리는 고립이라 할 만큼 독립적이어야 한다. 모든 의견을 가이드로 참고하되 오직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할 것.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휩쓸리고, 망각제를 주사받고 잊어버린 다음, 또 순식간에 휩쓸린다. - 닭대가리가 된다.
27.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줄 선학(先學)을 갖지 못한 채 우리의 별들을 찾아 헤맸다” - 숄렘의 발터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 -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본문 63쪽.
28. 항상 되새기는 것 - 아름다움은 도처에 존재하고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예민해야 한다 - 타르코스프키. (맞나?)
29. 내가 원하는 것, "신화"가 없어지는 것. 그런데 나의 욕망은 아주 많이 반대로 흐른다.
30. 항상 꼽씹는 것 - '수공업의 POP'이라는 명제.'
1. 왜 대중예술계와 공생하는 일군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진정하다/진정하지 않다"라는 것은 왜 항상 소위 "작가주의"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소위 "예술가 나르시즘"과 결합되어 있는가. '진정하다'라는 평가는 "숭배"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렇게 높은 상찬과 연관이 되어야 하는가.
2. "진정성"이라는 것이 예술을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진정성이 있지만 형편없다'라는 평가는 왜 실제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진정성"은 예술 그 자체인가?
3.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성을 가진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이 그대로 예술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동을 주었다"고 해서 "예술적이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만약 암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은 예술이다.
4. 한국의 인디음악씬에서 "진정하다"는 말은 인디씬의 열악함에 대한 보상심리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오직 그것만으로만 주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서의 대중음악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음원소스의 퀄리티와 작곡센스, 편곡 능력에서 이미 인디씬은 뒤쳐진지 오래이다.
5.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진정성"에 대한 강박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선한 흐름"이라는 부각이 대세였는데, 아무도 "크라잉넛"을, "언니네 이발관"을 "진정성이 있다"는 이유로 칭찬하거나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팔릴 수 있음"이 인정된 "신선함"은 주류씬에서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획"하는 시기이다. 때문에 인디음악씬이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진정성"이 된 것일까?
6. 진정성 패티쉬 - 현재 한 켠에서 고고하게 남아 잇는 흐름은 일련의 "진정성 패티쉬"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편견들이 있는데, (1) 진정한 음악이라면 정제되고 정련된 음의 세계를 구사할 것이다. (2) 포크송 혹은 펑크, 블루스, 힙합 등 고통과 고뇌, 혹은 분노를 중요시 하는 음악일 것이다. (3) 존재감 있는 보컬이 나온다. (4)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5) 그는 어려운 현실에서 치열하게 음악한다.
7. 댄스음악이나 실험음악은 진정성이 없는 음악이 된다. 편협한 예술관.
8. 이러한 "진정성 패티쉬"는 80년대 "대학생 노동문예운동"의 여파로 보인다. 계급이나 노동, 혁명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불끈했던 "맑시즘 패티쉬"의 변종이다. 요약해서, 부르주아의 문예와 프롤레타리아의 문예를 구분했던 민중문예운동관의 변형태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는 "치열하게"라는 용어이다) "문화의 건강함"에 대한 일종의 윤리, 도덕적인 가치관이 개입한 결과물이다. 예술관을 대체한 정치-윤리관.
9. 음악 텍스트 자체를 즐기기 보다 '음악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자기 머리 속의 명제를 더 즐기는 욕망으로 인해 이러한 예술관은 존속한다. 음악 텍스트 자체보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신화적 서사를 더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 그 뮤지션이 어떻게 절망 속에서 일어서서 음악을 만드는데 매진했는가를 연도별로 외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음악을 추천할 때 뮤지션의 연대기를 반드시 함께 소개한다!
10. 이런 의미에서 예술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유하는 것은 생산자의 나르시즘을 항성으로 하여 그 주의를 운항하는 행성이 서로 공유하는 그것이다. 부끄러운 스텝을 밟으며 빙빙돌게 만드는 나르시즘 간의 인력.
11. 진정성에 대한 평가가 영웅주의를 곁눈질한 듯한 작가주의와 연관된다는 것은 불행, 그것이 작가적 나르시즘과 직결하는 것은 더 커다란 불행이다. 그것이 실제로는 대중스타를 꾸며주는 레이스 꽃무늬가 되어버린 것이 요즘의 세태이다. "진정성"이거나 "진정성의 클리셰"이거나 "진정성 패티쉬"이거나 "진정성 패티쉬의 클리셰"이거나, 혹은 "작가주의적 나르시즘"이다.
12. 자기 의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진정성 패티쉬"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있는 음악인 - 자우림. 서태지. '그것'으로 대접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클리셰'를 반복, 그 결과로 '그것'으로서 인정받고 있으므로. (패닉 첨가) - 또, 그들(클리셰)에 대한 클리셰, 문희준.
13. 예술가는 자기 삶으로 자신의 예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예술관이다. 예술보다 그 예술가의 물질조건이 더 진정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14. 뮤지션의 삶이 힘겨워서 그의 음악은 더욱 가치를 지닌다? - 새빨간 거짓말. 마찬가지로 어렵게 만든 예술은 멋진 예술이라는, 공모된 환상.
15. 사실 이런 사람의 취향은 언제나 포크송으로 회귀한다. 왜냐면 지식인이 즐길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란 결국엔 포크송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펑크를 포크송처럼 평론하고, 힙합을 포크송처럼 평론하고 팝송을 포크송처럼 평론한다.
16. "작가주의적이지 않은" 제작/기획된 작품은 필연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그러니까, [카사블랑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작가"보다 "프로듀싱"이 더 중요한 영화는 형편없는 작품들인가?
17. 질문 : 근본적으로 '깊이 있게 즐기는 것'과 '가볍게 즐기는 것' 사이에 과연 우열관계가 있는가? - 답 : 나는 가볍게 즐기는 것을 상당한 경지로 몰고 간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깊이 있게 즐기는 것'을 매우 천박하게 운용하는 사람도 알고 있다.
18. 그러므로 어떤 텍스트의 안에 내재된 힘을 마술적으로 과대평가 하는 것은 텍스트와 교감하는 인간을 과소평가 하는 결과이다. 항상 '나는 저것을 할 수 없다'라는 것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학대이며 동시에 숭배할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어째서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우상을 받아들이고, 없으면 만들려고까지 하는가?
19. 우상이 없는 예술 - 영웅이 없는 예술 -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술 - 이렇란 형태는 그저 무정부주의인가? 뭐라고 이름붙여야 할까? 나는 정말로 이것을 원한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나르시즘과는 관계없이. 현재는 이러한 방면으로 진화해가고 있지만, 나는 "높은 수준"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다. 이를테면 어슐러 르 귄 정도로는 SF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한 둘은 있었으면 좋겠다.
20. "작가"라든가 "진정성을 가진 노래"라거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녀석들은 혐오스럽다. 대중을 호도한다. 차라리 "스타"와 그 "빠순이"들이 훨신 낫다. 그들은 속이지 않으며 속이려고 해도 그럴 실력이 없다.
21. "듀란듀란Duran Duran" 같은 밴드는 당시의 비평가들에게 "얼굴 밴드"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듀란듀란을 듣고 자란 세대가 비평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기가 오자, 듀란듀란은 '외모 뿐 아니라 음악적 센스도 뛰어난' 밴드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듀란듀란에게 영향받은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급상승, 욕망과 권력. - 부르디외.
22. 진정성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우리는 상호교감이란 끊임없는 가변성 속에 놓여 있고, 그것이 가변성이야 말로 문화의 풍요함을 보증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 그의 예술취향은 그의 성적 취향과 그 사람의 성장배경, 자라면서의 트라우마, 현재의 사회적 환경과 스트레스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 삶의 진정성을 언급할 때 그의 성적 취향과 음식 취향, 그리고 주거환경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오직 "서사"의 플롯에 해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열거한다. 이 용어는 삶을 대변하는 듯 하면서 삶을 배제하는 폭군이다.
24. 어떤 이들이 히피 밴드를 따라다니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사랑과 평화의 이상향을 추구한다면 나는 그들의 "히피음악의 진정성"에 대한 주장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진정성"이라는 말 따위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자연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에 대해서 진정성 여부를 묻지는 않을 테니까.
진정성이라는 말은 자기 삶의 그럴듯한 대용물을 찾아헤매는 이들의 기원으로, 서구적인 자학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고행과 구원의 모델을 내재한다. (BGM - 제프 버클리 : 할렐루야Hallelujah)
25. 예술을 구원하는 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의 삶이지, 그것을 만든 이의 삶이 아니다.
26. 현재 한국사회의 "대중예술관"은 지나치게 30대 중반후반 남성들의 이데올로기와 감성에 맞추어져 있다. 그 외의 세대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대중문화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질 않는다. 지적 욕심으로 가득찬 10대가 30대 중반의 눈과 감성으로 앨범을 평가하는 것을 읽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10대 예술생산자가 30대 중반후반 남성 비평가의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파괴적인 일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이 "관觀"을 가지고자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 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전의 세대는 대중문화에 관심이 없고 그 이후의 세대는 조직화된 세계관이 부재하므로.
이 사회에서 우리는 고립이라 할 만큼 독립적이어야 한다. 모든 의견을 가이드로 참고하되 오직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할 것.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휩쓸리고, 망각제를 주사받고 잊어버린 다음, 또 순식간에 휩쓸린다. - 닭대가리가 된다.
27.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줄 선학(先學)을 갖지 못한 채 우리의 별들을 찾아 헤맸다” - 숄렘의 발터 벤야민에 대한 회고록, [한 우정의 역사 -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본문 63쪽.
28. 항상 되새기는 것 - 아름다움은 도처에 존재하고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예민해야 한다 - 타르코스프키. (맞나?)
29. 내가 원하는 것, "신화"가 없어지는 것. 그런데 나의 욕망은 아주 많이 반대로 흐른다.
30. 항상 꼽씹는 것 - '수공업의 POP'이라는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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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와함께읽는문화2] 새로운 문화 만들기
: 곰도사의 주술호응 2005/01/15 03:08 Delete엄밀하게 말해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예술"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중략) 예술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이상 새로운 예술을 위한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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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정성 패티쉬'와 예술 - 몇 가지 생각 정리 by 깜악귀
: poptune co. 2008/11/25 13:41 Delete'진정성 패티쉬'를 빌미로 한 몇 가지 생각 정리 1. 왜 대중예술계와 공생하는 일군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진정하다/진정하지 않다"라는 것은 왜 항상 소위 "작가주의"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소..
